우리가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여기에는 외부의 객관세계에 대한 주관세계의 작용이 상당히 들어 있다. 우리는 2+2=4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믿음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믿음을 동원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남녀노소, 인종과 종교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누구에게나 기정 사실인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자유와 결단이 개입할 공간을 전혀 허용하지 않고 우리의 지성을 구속한다.
그러나 믿음은 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믿는 사람의 지성과 자유 그리고 인격을 동원한 행위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 나는 나의 지성과 의지 그리고 인격을 동원하여 그를 믿기로 결단을 한 것이다. 내가 그를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을 믿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하느님께서 나에게 금방 어떤 벌을 내리시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잘못되지도 않는다. 삶은 그런 대로 흘러간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별 탈 없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심지어 주민의 대부분을 굶주림의 처지에 몰아넣고도 배불리 먹고사는 독재자가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강요하거나 압박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믿음의 종류에도 해당한다. 어떤 사람은 좀 더 열심히 믿고 어떤 사람은 대충 믿고 산다. 어떤 사람은 꿈이나 현실에서 성모님을 보았거나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그런 특별한 종교적인 체험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게 그러한 체험을 간절히 원한 사람이 그러한 체험을 하고, 그러한 체험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그러한 체험을 하지 않게 된다. 특별한 체험을 했다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그런 대로 살아간다. 믿음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일반 상식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자연과학적 또는 수학적 진리와는 달리 상식은 시대와 문화권 그리고 주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입고 있는 옷을 5백년 전에 입고 길에 나섰더라면 모두들 쳐다보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여름날 해수욕장에서는 괜찮은, 수영복을 입고 지하철을 탈 경우에도 그러할 것이다. 상식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형성한 서로 간의 약속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의 기본적인 척도는 일반 사람들의 삶에 유익하거나, 최소한 불편을 끼치지 않을 정도의 생각과 행위이다.
믿음은 한 사람의 지성과 자유 그리고 인격을 동원한 중대한 결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믿음을 존중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어떤 한 사람이 가진 건강한 믿음과 신념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가 속한 공동체나 국가를 구할 수도 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가진 믿음은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고 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일반적인 상식의 선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 큰 부담을 줄 때에는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되고 만다. 어떤 특수한 종교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자기를 높이거나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러할 경우에는 불신과 심각한 검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파티마나 루르드에서의 성모 발현 체험과 같이 실제로 체험한 사실을 어떠한 불이익이 와도 꾸준히 증언하면서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영적 삶에 큰 풍요를 가져다 줄 경우에는 믿음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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