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가톨릭 신자, 비신자를 떠나 「가톨릭 교회」를 연상시키는 가장 중요한 상징인가 보다. 지난 해, 「문화 콤플렉스에서 인간해방으로: 「새로운」 마리아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으로 어느 학술재단에 기초학문 학제간 연구과제로 신청한 적이 있는데, 특정 종교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부적격 판정을 받고 크게 실망했었다.
우리의 목적은 세계 문화 속에 파급되어 각 지역문화에 접목되거나 흡수된 보편적이고도 특수한 여성 모델이며 인간문화 전반에 영향을 준 마리아를 개인을 초월한 「공동체적 인격」이자 일종의 문화코드로서 읽어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해방을 가져오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제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친 벽은 마리아가 인류문화에 준 영향을 객관적으로 살피려는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전통적인 「마리아」의 이미지가 곧바로 종교로서의 가톨릭 교회로 연결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좋든 싫든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와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인간 해방을 위한 「새로운」 마리아 패러다임도 가톨릭 교회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교회의 가장 훌륭한 전형과 모범으로서 존경을 받으시는 「동정녀이시며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이미지는 교회의 이미지와 곧장 연결된다.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배필」, 「어머니요 스승」이라는 상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계성을 가지며, 또한 신앙의 씨앗을 심고 키워간다는 의미에서 어머니로서 규정된다.
이러한 친밀한 인격적 표현은 하느님과의 동반자(파트너)라는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는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간직하여야 할 신앙의 자세이지 생물학적인 여성에게만 적용될 문제는 아니다.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비유적인 상징이 여성의 본질을 어머니요 아내로서 규정하고, 모성과 동정성의 소명을 여성에게만 적용하여 처녀-어머니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여성상을 떠받드는 여성 억압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존속시켜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이라는 덕목에 갇혀 숨쉬지 않고 화석화된 수동적이고 유약한 인간이 아니다.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공동협력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명확히 깨닫고 주체성 있는 선택을 할 줄 알았으며, 산(産)달에 이른 엘리사벳을 찾아 하느님의 비전을 함께 공감하고 격려할 수 있던 여인이었으며, 구원의 기쁨을 노래할 줄 알았던 인간 해방의 선포자였고, 예수님의 사명에 깊이 동참하며 혈연 가족을 넘어서 신앙 가족을 일구어 낸 믿음의 증거자였다.
성서 속에 나타난 마리아의 모습은 흥미롭게도 유연성과 다양성, 관계능력이 중시되는 현대 정보 사회 안에서 자기지도력과 상호지도력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상으로 부각된다.
뚜렷한 정체성과 소명감을 가지고 주체성 있게 자기 삶을 개척해 간 강인하고 용기 있는 여성으로서, 또 개인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범위를 확장하여 공동체를 이루며 섬김의 지도력을 이끌어 간 여성으로서, 동반적 관계 안에서 세상의 이목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진정한 믿음의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동안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마리아에 대한 교의나 교회의 여성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현실화한다면 새 시대가 요구하는 조화롭고 균형잡힌 인간상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고 구호라도 외치듯 가장 보수적인 정치 분야에서조차 당 대표다, 당 대변인이다 하여 여성을 앞세우고, 여성장관의 수가 진보의 척도라도 되는 듯 떠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우대가 진정 변화된 인간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패한 기존 집단의 겉모습만 포장하려는 얄팍한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 해방과는 거리가 먼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을 보며 가톨릭 교회 전통이 간직해 왔던 마리아 공경과 교회의 여성적 이미지가 현 시대가 요청하는 남녀 평등과 인간 존엄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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