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오스트리아의 아드몬트(Admont) 수도원에서 친구인 가브리엘 신부와 알프스 물의 품질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대화는 자연스럽게 물의 기원으로까지 옮겨가게 되었다. 나는 『공기인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작용을 하는 물이 만들어졌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신비롭다』고 하면서, 『물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찌하여 지구표면에 이렇게 많이 있을까?』라는 말을 던졌다. 그러자 가브리엘 신부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보다는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고 감사하게 생각해』라는 응답을 했다.
이런 말을 들은 나는 「20년 동안 친구로 사귀고 있지만 서로 의식의 구조가 여전히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친구의 편한 속이 부럽기도 했다. 「역시 수도회신부의 영성이 교구신부의 영성보다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대화 이후 나의 머리 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알기 위해 매일 애를 써야 직성이 풀리고 보람을 느끼는 나의 삶과, 주어진 자연 속에서 잘 다듬어진 수도원의 건물과 일터 그리고 규칙과 더불어 하루 하루의 삶을 단순하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가브리엘 신부의 삶이 오랫동안 비교되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로 구성된 우주 자체는 아무런 말이 없다. 물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의 기원과 그 성격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 안의 모든 것들과 함께 말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목숨이 유지되도록 공기, 물, 음식물 등 많은 요소들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다. 어떤 대가나 고맙다는 말을 듣기를 요구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다. 의미가 있다고도 하지 않고 없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를 사랑한다고도 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고도 하지 않는다.
우주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에 대해 의미와 사랑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나의 일이다. 내가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이 우주 전체가 사랑으로 가득 찬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도, 생명체들을 끊임없이 먹여 살리는 것도,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모두가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의 결과가 된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번성하고 있다.
내 안에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 안에 사랑이 없다. 이 우주 안에 사랑이란 없는 것이고, 우주는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일 뿐이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냉혹한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나 사랑이란 것도 말이 안 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그분이 사랑으로 다가오신다 해도 나는 그것을 인식해 내지 못한다. 내가 그것을 공감하고 인식할 의식구조를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든 사랑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물들인다. 또한 사랑으로 다가오는 분들의 사랑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내 안에 사랑이 있을 때,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사랑으로 맞이하게 되고, 하느님께서 이 온 우주를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살리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란 것을 알게 된다. 내 안에 든 사랑이 절대적인 침묵 속에 냉혹하게 있는 듯이 보이는 우주에게 말을 걸어, 이 우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고 밝은 대낮과 별이 총총한 밤을 믿음으로 대하게 한다.
사랑은 나와 이웃 그리고 우주와 하느님을 의미 있게 하고 함께 살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안에 어떤 사랑이 어느 정도의 강도로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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