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4년 5월 6일은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큰 환희와 감격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가진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시성식은 세계 교회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파격이었다.
전통적으로 바티칸에서 열리던 시성식을 바티칸 밖에서, 그것도 머나먼 극동 지역의 한국 땅에서 거행을 했고, 더군다나 무려 103명이나 되는 한국 교회의 신앙 선조들을 한꺼번에 성인으로 선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는 순교 성인 탄생의 감격이 퇴색한 듯해 아쉬운 마음이다. 시성 20주년에 즈음해 한국교회는 제2의 시복시성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103위 성인 탄생 직후부터 이어져온 초기 교회 선조들의 시복시성운동이 이제 결실을 맺게 되는 단계로 들어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굳건한 믿음과 정신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매년 순교자 성월을 비롯한 여러 기회마다 순교자 현양과 순교 정신의 실천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고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신자들의 삶 속에 순교자들의 정신이 깊이 배어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위기 상황들이 바로 그것이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고 삶과 신앙이 유리된 이중적인 신자 생활, 냉담자는 증가하고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비율은 줄고 있다.
성직자들의 권위적인 사목 활동이나, 수동적이고 구태의연한 평신도들의 신앙 자세, 그리고 현세적이고 지나치게 활동 지향적인 수도자들의 모습 등 우리 교회 구성원들 각자가 여전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교회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데 부족해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우리는 103위 순교자가 성인으로 선포된지 20주년을 맞았다. 20주년이라는 기회가 단지 시성식을 기념하는 일회적인 행사를 갖는데 그치거나 당시의 감격에 자족하는 소극적인 의미로써만 머문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20주년이라는 기회를 통해 우리는 순교자들이 왜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했는지,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은 곧바로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 순교 정신을 실천하는데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는 것, 순교 정신이 곧 자기 삶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이 바로 시성 20주년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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