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이 살아 계셨을 때 불교계는 흔들림 없이 튼튼해 보였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총무원장 자리다툼으로 스님들 간에 각목 싸움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제 불교가 한국 땅에서 몰락하려나 보다」는 염려를 했다.
그런 일이 있던 시기에 친구인 효광 스님이 주지로 있던 봉암사에 들리니 두 눈에 푸른 정기를 가득 담은 많은 수의 수행 스님들의 자태는 여전히 꼿꼿했다. 효광 스님 역시 그런 일에 별다른 걱정이 없었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봉암사 이야기를 해 주었다.
봉암사는 외부인 출입을 금한 채 전국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선을 수행하는 절이다. 당시 사십대 초반이던 효광 스님은 절을 관리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등 행정 일은 자신이 하지만, 정신적으로 진정한 주지는 30리 계곡을 포함한 800만 평 경내 여러 곳에 말없이 계시는 큰스님들이라고 했다. 큰스님들은 가끔씩 법문을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도 만남도 없지만 봉암사를 봉암사이게 하는 어른들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어서 사판(事判)의 일인 주지 임기가 끝나고 이판(理判)의 일인 수행을 할 수 있기를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가 주지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 4년 임기를 한 번 더 하도록 임명을 받았을 때에는 순순히 받아들이는가 했는데, 얼마 후 수행을 하기 위해 그 자리를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그분은 지금도 이 땅 어디에선가 구름과 물을 벗삼아 용맹정진하면서 몸과 마음의 푸른 정기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알려지기를 원하지도 않는 큰스님들이 깊은 깨달음의 경지와 넓은 마음을 소유한 채 전국 큰 사찰 곳곳에 계신다고 한다. 아직 큰스님의 대열에 들지 않는 효광 스님의 깨달음과 푸른 정기를 생각하면 큰스님들의 마음의 그릇은 참으로 대단하여, 그 곁에 잠시라도 있어 본 사람들은 못내 잊지 못할 것이고 불교에 대한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불교의 가르침과 생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가톨릭 신부가 되려는 꿈을 접고 불교에 귀의한 현각 스님 이야기는 제쳐 두더라도, 서양에서 불교에 상당한 관심과 호감을 보이고 있고, 국내에서도 개신교 신자 수가 서서히 줄어들면서 불교 신자 수는 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나의 연구실에 들린 독일의 원로 교수 한 분도 이제는 자신을 불교신자로 소개한다고 했다.
불교계의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나는 가톨릭 교회에서 원로 사제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생각하게 되었다. 연세가 들수록 그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받는 큰스님들이 불교계에서 하는 역할과 70세 또는 그 이전에 은퇴하신 원로 사제들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하시는 그리고 하실 수 있는 역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떤 결론도 맺을 수 없는 생각을….
분명한 것은 양적으로 팽창해 가는 교회 안에 불교의 큰스님과 같은 영적으로 깊고 마음이 넓은 어른들과 맑고 깊은 푸른 정기를 가진 희망의 젊은이들이 비례하여 많이 존재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분들이 많이 성장해 나오도록 기도해 본다. 땅에 있는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도 최선을 다해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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