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가 끝난 지 6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일본으로 해서 우리는 또 한 차례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야 할 모양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관계에 들어가 꽤 높은 관직까지 올랐다가 지금은 물러나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있다. 며칠전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화제가 과거사 청산 문제에 가 닿았을 때였다.
친구가 어이없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으로 조상들의 과거를 캐 보았다는 것이었다. 조상의 과거를 캐다니? 놀라는 내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조상은 다행스럽게 창씨 개명한 사람이 없더라구』
조상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서 안도했다는 친구를 보며,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으로 흘러가나 싶었다. 이제 와서 조상이 창씨개명을 했느냐 안했느냐에 전전긍긍해야 하고, 그 친구처럼 조상의 호적을 까발리고, 그야말로 조상의 뒷조사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리라는 생각을 하자 참담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제 와서…. 해방 60년이나 되는데…』하는 자조 섞인 탄식과 함께.
나는 초등학교를 자유당 정권의 반일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학교 교실에는 언제나 「방공?반일」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64년의 한일회담을 앞두고 거기 반대하는 「굴욕외교 반대 시위」로 대학생이 되면서 첫 사회참여를 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 만나야 했던 현실은 「기생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인 관광객을 쓰디쓴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세대의 산업역군들은 수출입국의 최전선에서 생존의 무기로써 이른 아침 학원을 다니며 일본어를 배워야 했던 일그러진 자화상을 또한 가지고 있다.
해방 후 세대로서의 일본과 얽힌 정신사적 의미는 이렇게 굴절되어 있거나 가련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런 우리가 이제 와서 다시 조상이 창씨개명을 하지나 않았는지 호적을 뒤지며 전전긍긍해야 하다니.
일본은 이렇게도 끈질기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망령이어야 하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안으로는 친일문제를, 밖으로는 한일문제를 어느 것 하나 선명하게 청산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의 과거사, 그 역사청산이 어떻게 미루어졌는가를 되묻기에도 이미 때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걸 누구나 안다.
그리고 이것은 그냥 안고 가야하기에는 너무 큰 민족적 과제다. 다만 방법이다. 정치가 역사를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역사의 젖은 양말은 시간이라는 햇살에는 마르지 않는다. 이미 늦어 버려도 많이 늦은 일이지만, 누가 친일문제를 밝혀내어 「민족정기를 되살리자」는데 반대하겠는가.
문제는 정치적 접근에 있다. 왜 이 준엄해야 할 일들이 정파가 얽힌 정치적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좀더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은가.
정치가 과거를 기록하겠다니,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캐내어, 무엇을 어쩌자는 과거사 청산인가. 그 원론적인 의문이 떠나지 않는 것도 그렇기 때문이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한일문제에 있어서든 친일문제에 있어서든 우리는 과거를 그냥 둔 채 거기 물을 대어 연못을 만드는 방법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그 과거는 연못의 물 속에서 썩지도 녹슬지도 않고 그냥 상처가 되어 남아 있다. 그러다가 현안이라는 이름으로 문제제기가 되어 가뭄이 들면, 물이 졸아들어 그 과거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신도 되돌릴 수 없는 「과거 그 자체」가 아니다.
그 과거를 통해서, 그것을 청산하고 극복하는 「과거가 만들어줄 수 있는 더 밝은 미래」인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말 그대로의 선명한 청산으로 흘러가, 화해와 미래를 약속하리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우냐에 따라 이제 과거가 미래를 만들어 주는 시련 앞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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