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암 환자였습니다.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데다 시력마저 잃고 앞을 못 보는, 찾아오는 이 조차 없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 물으셨지요.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신부님은 키가 나지막한 박스 가득 모래를 담아서 다시 왔습니다. 사랑의 하트 모양으로 야트막한 모래성도 만들어 넣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녀의 식어가는 손을 가만히 잡고 모래를 천천히 쓰다듬게 했습니다. 서로의 두 손, 가늘게 파르르 떨렸습니다. 그리고, 병실 가득, 파도소리가 퍼져 나왔지요. 그새 녹음해 온 바다 소리입니다.
무거운 침상에 누운 채, 마지막 꺼져가는 육신 속에 웅크려 떠는 한 영혼에게 신부님은 바다를 한가득 옮겨다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바다입니다.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 아픈 그녀를 위해 창조하신 바다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간절한 기도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틀 후, 그녀는 하늘 아버지 품으로 갔습니다.
시한부 삶에 앞마저 볼 수 없어, 이미 이 세상은 암흑 저 건너의 두렵고도 절박한 침묵일 뿐인 그녀에게 『무엇이 젤 하고 싶은가』라는 한 마디는 그녀의 삶에 있어 가장 진실한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감촉한 가장 마지막의 것 모래는, 어린 날의 소꿉놀던 추억을 되돌려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삶이 다해가는 그 얼굴에 가냘픈 미소 한 줄기, 어디선가 까르륵 웃는 어린 것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짐작컨대 그녀가 도착하는 하늘나라의 첫 마을은 모래벌 넓고 짭조름한 해풍이 부는 바닷가 마을일 것입니다.
하늘가는 길, 행여 우리 죄로 하여 칠흑 어둠이 가로놓여 있다 해도 이 모래의 쓸쓸하고도 따뜻한 감촉의 기억으로 그녀는 더듬어서라도 길을 찾을 것입니다.
가는 그녀와 남은 우리 모두, 아직도 그 파도소리 마음에 철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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