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 대축일이었을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나서 한 교우가 다가와서 말을 건다.
『신앙(信仰)은 소신(所信)과 무엇이 다른가요?』
아마도 조금 전 강론에서 들은 순교자들의 결연한 삶의 모습을 듣고 떠오른 생각이리라. 평소 스스로 심지가 굳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신앙 또한 굳은 의지(意志)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정치적 신념이 팽배하여 모든 것을 이념의 잣대로 재단해 버리는 듯한 세태에서는 더더욱 분간하기에 헷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소신이 무엇을 위한 소신이고, 무엇에 희망을 두는 소신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신앙과 소신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용공과 관련해서 워낙 자주 제기되어서인지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만, 원래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바로 그 소신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내 소신」을 「끝까지 뻗힌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시절에도 자기 소신을 끝까지 뻗히던 부류들이 있었고, 다양한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똑같이 접할 수 있는 그대로였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힘을 가진 이들 이데올로기 그룹과의 마찰이 예수님을 죽음에로 이끄는 외적 요인이 되었고, 이것에서 예수님 죽음의 내적 의미와 목표하는 바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반(反)이데올로기적이었던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그룹은 바리사이파였다. 이들이 주장하던 이데올로기는 율법에 바탕을 둔 정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이 정하는 계명과 금령들을 철저히 지켰다. 그로써 그들은 하느님 앞에 특권을 가졌다고 여겼고, 사람들 앞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확고히 알아듣는 독점권을 가진 듯이 행세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러나 율법과 자기 정당성을 하느님의 것인 양 하는 그들의 가면을 벗겨버리신다.
또 다른 그룹은 사두가이파였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맘몬이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실 때의 그 대사제, 원로, 성전지기들이 그들로서, 신심으로 위장한 장사를 계속해온 지배층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견고하게 하여 주는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이다』(마태 6, 24).
예수께서는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물질적 소유에 온 희망을 다 쏟는 태도를 비판하셨다.
에세네파도 한 그룹이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선택된 엘리트 정신이었다. 스스로 세리와 죄인들과는 완전히 단절하여, 사막으로 들어간 거룩한 남은 자로, 순수한 이들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이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나 모든 종류의 사람들, 생활수준, 인종, 가문을 불문하고 「모두를 위하여」 계신 분이었다.
정치적 결성을 이루었던 젤롯파 역시 당시의 한 그룹이었다. 열혈파였던 그들은 로마제국과 결탁하던 사두가이와는 반대 입장이었다. 그들은 폭력적 혁명을 주장하고 있었다. 몇차례 정치적 소요를 일으킨 이가 메시아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이들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소명을 사회정치적 의미에서만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 모두의 입장을 상대화 시키신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어라』(마르 12, 13~17)고 하시는가 하면, 『젤롯파의 시몬』(루가 6, 15 사도 1, 13)뿐 아니라 세리인 마태오도 열두 사도에 넣고(마태 10, 3 마르 2, 14), 『지배층의 부인들이 예수의 일행을 돕는 것을 허용하셨다』(루가 8, 3).
이들 그룹들의 공통점은 서로 대립되는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모두 실제의 「한」 측면에 집중하여, 개인이든 단체든 「한」 가치에 고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에 충실한 정의이든, 물질적 소유든, 나름대로의 선민사상이든, 정치적 반란이든. 어떤 것이었든 그것은 하나의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한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 유효하고 정당할 수 있는 삶의 한 특정한 부분을 일반적으로 전체에게로 적용시켜 보편규정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마치 최종적 목표인 듯이 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행위와 관계의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도 본다. 때로는 보수라는 모습으로, 또 때로는 개혁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를.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의 것과 피조물의 것을 혼동하는 데에서 모순에 빠지게 되고, 이는 나 스스로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의 인간됨까지도 망치게 하고, 급기야 하느님의 적이 되어 버리는 모순이 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