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만큼 얼렁뚱땅한 말도 없을 것이다. 추상같은 법칙의 준엄함을 생각하고, 공평한 적용을 걱정할라치면 법칙에 예외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수긍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일까.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정한 기준을 모두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대수라고 여기는 행태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 중앙 일간지에서 문학, 예술, 심지어 종교의 영역에서 조차 분야별 순위를 매겨 보겠다는 가당치 않은 연재를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통쾌하게도 각계의 원로들이 노발대발하고, 자신에게 매겨진 상위 순위 자체를 오히려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겨서 거부하는 바람에 중단되기는 하였지만. 우리 사회 안에서 「한 줄로 줄 세우기」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각자 나름대로의 예술, 삶, 신앙을 드러내는 것을 본분으로 하는 영역에 대해 누가 어떻게 「객관적인」 평가를 하겠다는 것인가.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요즘에는 객관적이라는 말이 갖는 함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무턱대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이기 때문에 엄밀한 것이고, 엄밀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는 도식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말이 가치중립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가치를 표방함에 유보적이라서 그 가치의 중요성이나 고귀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면 사실은 엄청난 우를 범하는 것이다.
수능시험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해서 온 나라가 시끌 벅적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수능시험 부정사건 자체만 가지고 재단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잘못된 교육관과 가치관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며 자신들을 차라리 책망해 달라는 자책의 탄원들을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학교 안에서의 일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병폐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동안 전국의 도시들을 한 줄로 줄을 세웠다. 그 결과 모든 지방도시가 특성도 살 길도 없다고 아우성이다. 모든 것이 서울 하나에로 모여 있기 때문이다. 서울도 서울 안에서 지역별로 한 줄로 세웠다. 지방도시도 도토리 키재기이면서도 또 똑같이 그 안에서는 나름대로 한 줄로 줄을 선다.
전국의 대학들도 한 줄로 줄을 세운다. 모두가 다 행정적인 잣대에 맞춰 평가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잣대에 맞추려고 혈안이다. 그 안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높이고 개선해 갈 수 있는 능력과 노력은 없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꽃이 어디 장미만 꽃인가. 다양한 특색들과 각각의 당당함이 드러나는 각양각색의 꽃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 사는 세상을 한 줄로 줄을 세우는 일은 조급하고 천박한 일일뿐이다.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1고린 12, 17~18).ㄴ 화이부동(和而不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령으로 쉽게 한 줄로 세우려는 것은 유혹이다. 다양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도 고민해야할 대목이다.
요즘 대학입시전형의 내용을 보면 대단히 복잡하다. 그러나 복잡한 만큼 학생선발의 다양성이 그 기준인지는 의문이다. 어떤 전공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을 제대로 준비하였는지를 가려내면 그만인데 그렇게 복잡한 전형의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일 뿐이다.
한자교육과 한글전용이라는 해묵은 논쟁의 경우처럼 두가지 모두에서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면 두 영역의 다양성을 키워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면 될 것이다. 마치 서양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는 라틴어, 그리스어를 필수로 이수하게 하는 것처럼, 많이 필요로 하는 영역을 위해서는 오히려 한자교육을 더 많이 요구하고, 적게 필요한 영역에서는 적게, 혹은 요구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아야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똑같이 하거나, 모두가 똑같이 하지 말아야 하는 양자택일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양성의 기준이 혼동될 때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이런 복잡성이거나, 혹은 역으로 그 복잡성을 피하기 위한 획일성이다. 그러나 이 둘은 다 위험한 것이다. 복잡성은 다양성을 위한 제대로 된 기준을 가지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고, 획일성은 모든 가치를 거부하고 무시하여 한 통속으로 뭉뚱그리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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