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새해를 맞이했다. 우리는 기쁜 성탄과 희망찬 새해를 기원한다. 요즘 말로하면 이른바 웰빙이다. 교회의 웰빙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예수님의 유명한 참된 행복 선언이 있다(마태 5).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는 당신의 자화상이다. 바로 그분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가난과 기쁨의 영성이다. 루가는 아예 실질적인 가난, 굶주린 사람은 행복하다고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천사의 환호와 함께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마구간의 구차한 모습으로 선보인다. 구세주임을 알리는 표지 역시 포대기에 쌓인 갓난아기였다. 성탄은 가난의 신비가 아닌가 싶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 모든 영성을 담아낸다. 그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또 어떤가? 사람들에게 먹히는 음식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이것이 그분이 보여주는 행복한 삶의 방식이다. 세상의 웰빙과 얼마나 다른가!
그분은 가난을 선택하셨고 행복하셨다. 성서 곳곳에서 당신을 작은이로 자처하시며 가난한 소외계층에 편애에 가까운 사랑을 보이셨다. 루가복음 4장에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행한 당신의 첫번째 설교에서 일생을 통한 사목지표를 발표하신다. 바로 가난한 이에게 기쁜소식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살고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두가지 표징에 충실해야한다. 교회는 투명하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리스도가 당신 백성을 만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셨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옥에 가두고 무엇 때문에 우리 일을 방해하러 왔느냐고 힐책한다. 우리 역시 그분을 안다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지는 않는지…. 가난한 교회, 가난 때문에 하느님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교회의 웰빙을 위해 다음을 제안한다.
첫째, 본당은 물론 교회기관의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선 배정하는 것이다. 의료시설 경우는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무료병동을 운영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가난의 정신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일꾼들을 키우자. 하느님의 일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둘째, 본당 관할구역 내에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작은 시설이나 쉼터 등을 설치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의 면모와 함께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가 된다. 얼마전 교회 사회복지시설이 고발되는 사건이 있었다. 사회법 저촉을 논하기 전에 가난의 영성에 부합한 운영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대단위 복지시설은 인권침해나 운영상의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작은 그룹홈은 대단위 시설의 대안이다. 거대화는 자기 파괴로 가고 만다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또한 여러 계층, 특히 어려운 처지에서 스스로 돕거나 자활하려는 이들의 모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단주모임이나 장애인모임 등). 교회 안에서 작은 이들은 더 보호되고 존중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야 한다(1고린 12, 12~17참조). 마찬가지로 본당의 사목구조도 삶의 현장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여러면에서 약한 이들도 공동체 안에서 아우르는 것이다. 소공동체로 엮어진 교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난의 영성을 새롭게 하자. 말구유의 무욕, 나자렛의 그 단순함, 십자가의 고통, 성체성사의 내어줌은 바로 가난의 다른 모습이다. 탐욕의 이 시대, 가난의 정신만이 치유책이 될 것이다. 탐욕은 모든 악의 근원으로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았다. 가난의 정신이 희망이고 가난이 구원의 징표임을 천명하자. 가난을 사랑하는 누이로 받아들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그리스도께서 가난하셨기에 가난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르 드 푸코, 가난한 교구민과 함께 하기 위해 예언자적 가난을 살고자했던 브라질의 헬더 까마라 대주교, 이런 선각자들의 영성이 우리의 심금을 울렸으면 좋겠다. 가난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어떤 사업을 시작할 때 가난한 이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운영되고 있는 여러 사업도 복음정신에 맞는지, 시초의 목적대로 나가고 있는지 식별해야 한다. 만약 아니라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본래 취지와 기능은 간 곳이 없고 생존논리에 따라 굴러가는 시설과 기관이 있는 것이다.
결론은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있고 우리의 방식이 있다. 우리의 길에 충실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가난의 영성에 따른 자발적 가난은 우리를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행복, 복음적 웰빙으로 초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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