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있게 대처해야
운전을 하다 보면 불합리한 속도제한에 불평해 보지 않은 경우가 드물 것이다. 고속도로보다 나은 길인데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속도로 제한해 놓으니 초행길인 사람만 더러 단속 카메라에 잡힐 뿐 대개는 존중하지 않고 「적당히 알아서」 간다.
속도 무제한으로 유명한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에도 사실은 속도 제한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무제한이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엄격한 제한이 있다.
예를 들면 고속도로가 숲 사이로 진행되고 있을 때 짐승이 뛰어드는 위험을 감안해야 하는 구간 같은 곳이다. 속도무제한에 익숙한 그들이지만 이런 제한구역에서는 철저히 따르는 것이 눈에 띈다.
속도제한의 이유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도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러운 것은 교통 표지판이 있어야할 자리에 제대로 있고, 또 그것이 존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불합리한 상황을 워낙 자주 만나서인지 스스로 적당히 알아서 피해가는 경우가 굳이 운전에서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해야할 것과 하고 있는 것의 차이, 당위와 현실,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큰 것이다.
사건이나 사고가 생기고 나면 우리는 으레 안전 불감증이나 도덕 불감증을 이야기 하곤 한다.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지 못했다는 말이다.
교사나 교수가 있어야할 자리, 노동조합이 있어야할 자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할 자리, 자녀가 있어야할 자리. 특별히 지도층의 도덕불감증은 그 정도도 심각할 뿐 아니라 파급 영향도 엄청나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클 때 정체성의 상실이 온다. 그 간격이 회복되지 못한 채 평행선을 긋고 있으면 정신병적 현상일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책임있게 대처하지 않으면서 가지는 이상은 공허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할 때 사실은 망각하고 이미지에만 집착하여 상대를 현혹시키는 데에만 골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내 행복이 놓여 있지 않은 데도 나는 그 근본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성전을 건립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예를 들어 돌 공사에 문제가 생겨 지적을 할라치면 『당신 혹시 나를 진짜 돌쟁이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자기부정 내지는 자기비하의 태도 같은 것이다.
내가 원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잘못되어서 지금 이 일을 할 뿐이라는 식이다.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에 충실하면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떤 비행기도 항로를 전혀 이탈하지 않고 날아가지는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그와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일직선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간격이 회복되지 않을 만큼 벌어지지는 않게 노력해야할 것이다. 알아서 적당히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맞서서 제대로 결판을 내고 결단을 내리는 과정이어야 한다.
웰빙(well-being)에 대한 관심들이 많다. 그러나 진정한 웰빙은 먹을거리나 주거 공간 같은 주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있어야할 것이 제대로(well) 있는(being) 것을 말한다.
『너희는 내 말을 잘 들어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15, 11)하신 말씀의 본 뜻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를 전적으로 투여하지 않고 어줍잖은 거리에서 「적당히」 머무르고자 할 때 사실 나는 어떤 것에도 든든히 뿌리 내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멀리 가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않된다.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멀리 갈 생각만 갖고 있다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흐트러져 있는 것은 무질서이고 혼란이며 혼동이다. 예수께서 성전파괴에 대해 말씀하시는 대목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태 2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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