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풍요 나누고 어려운 이웃 도울때 축복받아
시대의 화두가 「세계화」인만큼 의사인 나도 세계화의 급류를 실감한다. 노숙인과 행려자를 주고객(?)으로 하는 영등포 쪽방동네의 초라한 자선의원에서 「세계화」를 실감한다면 쉬 납득이 가지 않겠지만, 이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경험하는 「세계화」가 던지는 빛과 그림자는 다른 어떤 의료기관의 의사로 있다한들 더 생생하게 체험하기 힘들 것이다.
영등포파출소에서 종종 급한 연락이 온다. 시립병원 영안실에 누워있는 행려자의 신원확인 때문이다. 사망한 행려환자는 대부분 신분을 확인할 아무 단서도 없다.
다행히 신원확인이 가능한 경우는 먹다 남은 약봉지와 함께 주머니속 깊숙한 데서 나오는 꼬깃꼬깃한 요셉의원의 약봉투때문이다. 봉투에 적힌 이름 석자가 신원을 확인하는 유일한 단서요, 신원증명서다. 그가 환자로 요셉의원을 처음 찾아왔을 때의 상담기록을 추적하면 적어도 가족 중 한명의 연락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실마리를 가지고 연락한들 십중팔구 이미 가정은 공중분해된 지 오래라 그가 누구인지 이 세상에서 확인할 길은 없다. 이렇게 되면 영안실에서 하염없이 누워 기다리는 그에게 요셉의원은 의사와 환자로서 맺었던 단 한번의 인연으로 마지막 가는 길에 보호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노숙과 행려야말로 온전한 인격의 사람이라면 선택할 수 없는, 막차를 탄 인생들의 막다른 생활방식이기에 몸과 마음이 정상일리 없다. 이들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존재가 「술」이다.
가정과 사회라는 삶의 터전에서 튕겨나와 막막한 현실 한가운데서 도피하려는 이들에게 술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위로받을 수 있는 방법이며 노숙의 수치와 비참을 잊게 해주는 일등공신이다. 노숙인과 행려인의 90%가 알코올 중독환자라는 사실은 술이 노숙의 길로 들어서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정해진 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진료실에 마주 앉아 노숙인의 파란만장한 질곡의 개인사를 듣노라면 한때는 봄날 만개한 벚꽃 같은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폭풍우에 떨어져 형체도 없이 망가져 땅바닥에서 밟히는 망가진 꽃잎임을 떠올리게 된다. 이럴 때면 개인적 나태와 도덕성을 비난하며 개인적 책임을 추궁하려는 의도는 훌쩍 달아나 버린다.
물론 이전까지 품고 있었던 나름대로의 훈계나 교훈조의 이야기도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몸과 마음을 포함해서 인격 전체가 파괴되는, 노숙의 합병증으로부터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회복시킨다는 것은 치료라기보다는 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만큼 어렵다.
요셉의원의 환자들을 통해서도 「세계화」의 덫을 읽는다. 과거와는 달리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숙인이 되는 현상과 설사 일자리가 있어 일을 한다 해도 노숙에서 헤어나올 만한 생존에 필요한 대가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은 노숙인을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고착된 빈자로서 탈출을 불가능하게 한다.
얼마 전, 지난해 여름 요셉의원에서 봉사를 했던 캐나다에서 온 의사로부터 안부편지를 받았다. 환자의 안부가 궁금하고 잊을 수가 없어 하버드 의과대학 병원에서 연수를 마치는 대로 다시 봉사하러 오겠노라 약속했다. 그가 캐나다로 떠나기 전날 밤늦게까지 상처를 치료받은 노숙 환자가 그동안의 치료에 감사의 뜻으로 붕어빵을 사왔지만 떠난 다음날이라 전할 수 없었다. 그 붕어빵은 지금 요셉의원의 냉동실에서 다시 올 그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과거 내 이웃은 기껏해야 내 옆집, 같은 마을, 같은 도시, 같은 국가였다. 교통, 정보, 통신의 세계화 덕분에 이제 지구 어느 곳이라도 24시간이면 갈 수 있는 시대니 이제 이웃이란 말은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게 되었다. 세계화는 말 그대로 전세계를 나의 이웃으로 만들었다.
빈자의 가난은 더 이상 숙명의 침묵이 아니며 부자의 풍요와 안락은 가난한 이웃나라 사람과의 나눔을 통해 세계화가 낳은 불행한 덫에 한줄기 희망을 준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12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풍요의 땅 미국에서 영등포 쪽방 한 노숙인의 상처를 꿰매주러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학 병원의 의사가 온다. 지구라는 땅 덩어리 위에서 같이 살면서도 관계없었을 양극단의 사람이 이웃이 되어 만난다.
요셉의원의 창을 통하여 보는 세계화의 암울한 징조를 붕어빵 한 봉지로 씻어주는 희망의 메시지는 풍요의 땅에 사는 한 미국의사의 고백에서 살아있다.
『나의 풍요가 신이 허락하신 축복이 되려면 함께, 같이 하는 풍요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풍요는 저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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