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눈속에 파묻힌 이역 폴란드 들판
눈발이 휘날리는 늦은 오후
여기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린다
단지 군용담요를 만들기 위해
잘라낸 은, 갈, 회색의 머리카락
산더미로 쌓여있는 저 머리카락의 여인들,
크고 작은 신발 역시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한뼘이 채 안되는 신발들
저 신발을 신고 걸었을 앙증맞은 발가락의 어린이들
뒷축이 다 닳은 구두의 주인들,
깨진 안경
쭈구러진 가죽 가방들이 또 하나의 산더미다
끝내 희망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애지중지 했을 물건들….
그들은 그렇게
머리카락과 신발, 안경과 가방을 남겨두고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죽음의 이유 따위는 사치였으리라
죽음 직전의 처절한 고통이 시공을 넘어
내 발밑에서 꿈틀댄다
수용소 후미진 곳 18호 감방
나 아닌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바쳤던 콜배 신부님의
오로지 외길,
성인의 길을 걷다가 생을 마감했던
좁고 컴컴한 성지.
성인이 아침 저녁 드나 들었던 입구,
지금도 선명한 “일하면 자유로워 진다”라는
아치형의 철문을 뒤로 하면서
그저 슬픈 마음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아우슈비츠 벌판의 땅거미는 짙어가고
눈발은 더 굵어지는데
수많은 방문객의 두런거리는 목소리속에
이곳 감방과 가스실에서 떠난
그 숱한 영혼들은
지금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까?
그저
슬프다.
민병채(수원교구 양평본당 총회장)
-가톨릭신문사 주관으로 실시된 동유럽 지역의 성지순례 중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하고
기사입력일 : 200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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