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가 당뇨병이 있는 환자에게 자연분만을 권유해 태아를 숨지게 한 출산 보조원에 대한 대법원 파기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일반적으로 산모가 주기적으로 진통을 느끼거나 양수가 터질 때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본다』며 『이 사건의 경우에는 태아가 뱃속에서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업무상 과실치사죄 등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태아(fetus)란 『체내수정에 의하여 발생하고 나서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즉 임신 후 분만 시까지 모체 내의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한다. 민법 제3조에 의하면 사람의 권리 능력은 출생만에 의하여 취득함으로 원칙적으로 태아는 권리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태아의 이익에 관한 한 모든 법률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보는 일반적 보호주의(과거의 로마법, 스위스법)와 우리 민법이 취하고 있는 개별적 보호주의(한국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일본 민법), 곧 중요한 법률관계를 열거하여 이에 관하여서만 태아가 출생한 것으로 보는 입법 태도가 있다. 우리나라는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여, 민법상 몇몇 사안에 한하여 태아에게도 그 권리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민법에 의하면 태아는 사람은 아니지만(제3조), 예외적으로 일정한 권리에 한해서는, 이를테면 교통사고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해서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제762조). 따라서 직계존속의 신체 상해나 생명침해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고, 또 자신에 관한 재산상.정신상 손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제750조).
다만, 태아의 권리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포태(胞胎)가 장차 사람이 되는 것을 최소한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는 태아가 모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때 출생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태아로 있는 동안은 완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보험사들은 임신부가 교통사고 등으로 낙태한 때는 원칙적으로 낙태수술에 드는 비용은 보상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은 보상은 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임신부가 주기적으로 진통을 느끼거나 양수가 터질 때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본다』는 말을 납득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오랜 관습에서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해 왔다. 태어 난지 1년 뒤에야 한 살이 되는 서양과는 달리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된다. 이는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의 모든 성장과정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다.
태아도 엄연히 우리와 같은 고귀한 인간 생명체임을 분명히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민법 제3조는 물론 이번 판결문은 태아를 마치 물건처럼, 기계부품처럼 취급하고 있다. 참으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근거에서 태아를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할 수 있는가? 말을 못한다고 해서? 청각장애인도 말을 못한다. 팔다리가 없다고? 팔다리 없이 태어나거나 나중에 팔다리를 잃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에게 인간으로 부족한 점은 하나도 없다. 인간에게 귀속돼 있는 특정한 권리들은 신장이나 체중 때문에 변경되지 않는다. 그런 만큼 태아의 생명권 보호는 태아의 신장이나 체중, 표현능력이나 의식수준에 좌우되는 게 아니다.
헌법 제10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간 존엄」이라는 중요한 가치는 생명 보호를 전제로 할 때 실현될 수 있다. 곧 인간 생명이 있고 난 뒤에 비로소 「존엄」 「인권」 「행복」 등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며, 그러기에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생명 보호 절대의 원칙」).
마찬가지로 다만 「태어나지 않은 인간」, 또는 「생성 중인 인간」인 태아의 생명 또한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며, 그것을 보호하고 수호할 의무는 국가에 속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더라도 태아의 생명 보호가 없는 인간의 생명 보호란 있을 수 없다. 인간 존엄과 생명이 하나의 개념이듯이 태아와 인간도 하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헌법 제10조의 선언은 바로 국가가 태아에 대해 매우 포괄적인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우선 국가 스스로 태아의 생명을 침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존중의무), 나아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살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보호 의무).
이 의무는 실정법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보호 의무는 해당 법익이 헌법의 가치 질서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례하여야 한다. 헌법에서 생명보다 높은 가치는 없다. 생명은 인간 존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기본권의 전제가 된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 배아를, 태아를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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