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라는 것은 어려움을 혼자 삭여야 할 때니까 혼자 당할 수밖에 없고, 기쁠 때라는 것은 이웃도 아는 기쁨이니까 보통은 이웃들이 나보다 더 기뻐하고, 나는 그것을 봅니다』
은경축 감회를 묻는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하는 어느 주교님의 태도가 부럽게 느껴지던 10여년 전 봄, 참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나흘에 한 번은 쓰던 일기를 단 한 줄도 쓰지 않고 지냈습니다. 대부분의 일은 3개월 정도면 잊힌다는 통계를 어느 곳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하면서 세월은 그냥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아들이냐 종이냐?」라고 시작하여 「아버지!」라는 낱말로 끝을 맺은 그날의 일기는 느낌표가 참 많았습니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읽고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인 것입니다. 「기도를 잊고 지냈다, 종처럼 살아가며 하느님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는 반성이 뒤따랐습니다.
스쳐가던 성경 말씀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아무 걱정도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필립 4, 6~7)
여름휴가 다음이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잡지편집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법정 스님의 말씀을 접했습니다. 『기자분들은 남을 취재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취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기자로서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참된 자기가 아닌 허상의 자기가 취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연때를 만나 내 안에 육화된 이런 말씀들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여름 막바지 황금연휴라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 많을 듯합니다. 복잡한 일들 잊어버리고 자연과 벗하는 달콤한 휴식 속에서 하느님 말씀으로 위안을 얻는 계기가 된다면 오래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천둥번개가 요란하던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 마당으로 나가 고인 물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봅니다. 겹겹이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는 물방울들, 작은 반복, 일상을 다시 생각하는 하루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감사기도밖에 없다던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태풍이 비를 몰고 지나간 하늘은 푸르고 맑고 높습니다.
배봉한(경향잡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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