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신자 정체성 확립에 관심 기울여야
미국의 청소년 상담가인 마가렛 벳츠는 “오늘날 미국 사람들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이익과 관심”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둘이나 셋 모이기만 하면 그저 다른 사람들의 탓만 끄집어내려는 우리들의 친숙한 대화 문화(?)와는 사뭇 달라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주의 사회에서의 윤리적 가치는 이제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말이다. 윤리적으로 악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물질적인 이익을 안겨준다면 어떤 비난이라도 감수하고 기꺼이 행동한다는, 오늘날 지극히 일반화된(?) 행동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가렛 벳츠는 ‘이익과 관심’을 물질적, 세속적 의미에서 사용하였지만 그 의미를 영신적 혹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행동도 ‘이익과 관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이익과 관심은 당연히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이익과 관심을 따라 움직이기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회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시기별로 드러난 교회의 특징적 모습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초기 300여 년 동안은 박해의 시기였고, 이 당시 교회의 관심은 당연히 박해 중에도 굳세게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이 시기 교회의 관심은 순교의 영성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수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는 신학 연구가 가장 왕성하게 전개된 시기였고 또한 누구나 들어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토마스 데 아퀴노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배출된 시기였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역시 교회의 긴박한 관심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이교도들, 특히 이슬람교와의 수세기에 걸친 오랜 마찰에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 필요는 결과적으로 신학의 찬란한 발전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19세기 유럽사회를 격변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산업화의 물결은 가톨릭교회에 커다란 위기로 다가왔다. 팽배된 물질주의는 그리스도적 가치의 무조건적 거부로 나타났고, 당시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생활의 타락을 부추겼으며, 결국 교회는 수많은 노동자 대중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반 그리스도교 사상들에 반대하는 체계적인 가르침을 제시해야 할 시대적 요청을 받게 되었고, 당시 레오 13세 교황은 교회는 결코 노동자 대중을 버리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누리면서 생활해야 한다는 교회의 관심을 함축적으로 담은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한다. 당시 교황의 결단은 교회를 떠나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한 교회의 결정적인 관심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교회의 관심이란 ‘시대의 징표’를 알아듣는 교회의 참된 지혜로부터 나타난다. 성령의 능력으로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식별하고, 그런 다음 행동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생명윤리·평화·신자배가운동 등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관심, 수많은 병자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또 극복하는 일, 세계 도처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과 테러의 소멸, 그리고 평화…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가 관심사들이며 또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그 어떤 것들보다도 우선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대한 관심이다. 얼마 전 어느 연구소의 설문 조사에서 한 충격적인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들 중 내세가 있다고 믿는 신자들은 불과 30%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핵심 교리인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 없이 신자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영생에 대한 믿음’없이 자기희생과 사랑, 복음화, 생명존중, 평화, 하느님 나라의 구현 등은 한낱 구호일 뿐이다.
시대의 징표에 늘 깨어있던 교회가 순교의 영성, 위대한 신학사상, 노동자들의 품위있는 삶에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도 ‘신자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시대적 징표에 깨어 있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사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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