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 소급해서 권리 인정”
교통사고로 인한 태아의 보상 문제
교통사고로 태아에 이상이 생겨 낙태했을 때 보험사로부터 사망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법이 태아의 권리를 어디까지 보호하는지에 달려 있다.
민법에 의하면 태아는 사람은 아니지만(제3조), 예외적으로 일정한 권리에 한해서는, 이를테면 교통사고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해서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제762조). 따라서 직계존속의 신체상해나 생명침해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고, 또 자신에 관한 재산상·정신상 손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제750조). 다만, 태아의 권리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포태(胞胎)가 장차 사람이 되는 것을 최소한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는 태아가 모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때 출생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태아로 있는 동안은 완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보험사들은 임신부가 교통사고 등으로 낙태한 때는 원칙적으로 낙태수술에 드는 비용은 보상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은 보상은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태아는 보험 보상이나 손해배상에 관한 한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인가? 우리 민법은 ‘태아는 손해배상 청구권에 관해서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며 태아에게도 제한적으로 권리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네 가지 판례가 눈길을 끈다.
◎ <사례 1>
이 사례는 93년 4월에 내려진 판례로,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상해를 입은 사건에서 태아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내용이다.
당시 대법원은 “사고 당시 비록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뒤) 출생한 이상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부상으로 인해 입게 될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는 청구할 수 있다”며 보험사에 위자료를 보상하도록 했다.
◎ <사례 2>
이 사례는 <사례 1>처럼 부모가 아니라, 태아 자신이 본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경우이다. 76년 9월에 내려진 이 대법원 판례는 태아가 모체 안에 있을 때 입은 사고로 정상아로 태어나지 못한데 대해 사고 뒤 살아서 태어난 때에는, 사고 발생 시기에 소급해 권리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며 역시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
이 두 판례에서 공통점은 태아가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난 경우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태아가 살아서 출생하는 경우에 권리능력이 인정되며, 태아가 사고로 모체 안에서 숨져 태어나지 못한 때는 보상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태아가 모체와 함께 사망하거나 태아만 사망한 경우에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사례 3>
96년 6월 서울지방법원은 박아무개씨가 보험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교통사고로 낙태를 한 박씨에게 통상적인 후유장애 보상금의 두배에 가까운 위자료를 지급하도록 했다.
◎ <사례 4> 임산부 부주의 태아사망 자기과실 15%
임산부가 행동을 조심하지 않아 갑자기 중앙선을 넘은 자동차에 부딪혀 태아가 사망했다면 임산부에게도 15%의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부산지법 민사 34단독 이범균 판사는 이아무개(여, 부산시 사하구 다대 2동)씨와 남편 최모씨 부부가 박아무개(경남 울산시 남구 신정동)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박씨는 이씨부부 에게 924만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쌍둥이를 임신 중이던 이씨가 박씨의 처가 몰던 승용차에 부딪쳐 그 충격으로 태아 1명이 숨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로 인해 임신 34주 째인 태아를 잃은 자책감에 시달린 점이 인정되지만, 임산부는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데도 친척을 배웅하기 위해 차도에 내려와 있다 자동차에 부딪쳤기 때문에 15%의 과실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의학적으로 이같은 중대한 외상으로 태반이 자궁에서 떨어질 확률은 약50%로 경미한 외상으로 인한 1~6%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나 이 사고로 태아가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쌍둥이를 임신한지 34주 째가 되던 지난 95년 12월 3일 경남 울산시 남구 달동 이면도로에서 친척을 배웅하다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달려온 박씨의 부인 박아무개씨가 운전하던 갤로퍼 승용차에 부딪쳐 병원에 10일간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 태아 1명이 숨지자 소송을 냈었다.
지금까지 현행법 안에서 태아의 법적권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민법상 인정되는 태아의 지위는 권리 의무의 주체로서 완전하게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별적인 경우에는 태아의 권리를 인정하는 예외를 두고 있다. 형법의 경우 살인죄와 낙태죄의 경계선에 놓인 태아의 지위는 생명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어느 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선진국에서 낙태 허용의 한계를 둘러싸고 기간이나 요건 중심의 입법론이 다투어질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태아가 낙태죄의 행위 객체라고 하더라도 낙태죄를 처벌하지 않을 경우 결국 태아의 생명권은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낙태 현실은 우리나라가 태아 보호의 사각 지대임을 보여 준다. 태아는 태어난 인간에게 생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완전히 수동적인 약자이다. 우리의 이기심 또는 필요성이나 무책임으로 수많은 태아가 죽어가는 현실은 분명 우리에게 낙태 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이 절실한 때임을 알려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아 이전 단계인 인간 배아를 이용한 각종의 복제 실험이 무한정 허용되고 있는 현실을 규제할 법 제정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창영 신부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위원·본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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