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신뢰하고 상호 존중할 때 완전한 부부 공동체 이뤄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겠습니까?”(마태 19, 3). 이 질문은 본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남성중심적인 질문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 한국사회의 이혼율 증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질문은 단순히 남성들만의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한국사회 이혼율 통계자료를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이혼한 가정은 13만9천365쌍으로 이는 하루 평균 381쌍이 우리 이웃들 중에 이혼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록 전년도의 이혼건수에 비해 다소 감소한 수치라고는 하지만 이혼 문제는 여전히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통계자료를 좀 더 살펴보면, 이혼하는 남녀의 평균연령은 남성이 41.8세, 여성이 38.3세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부부의 동거기간이 4년 미만인 경우가 25.2%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94년도의 33.7%보다 많이 감소한 추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동거기간 20년 이상의 ‘황혼이혼’의 경우는 18.3%로써 94년 7.2%에 비해 2.54배나 상승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혼한 부부의 6%는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혼사유로는 성격차이에 따른 갈등이 49.4%로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으로 경제문제 14.7%, 가족간 불화 10%, 배우자 부정 7%를 보이고 있다.
필자가 이 지표를 통해 특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혼사유로서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이 2000년 이후 계속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부부 사이의 신뢰와 포용력 부족이 ‘한 몸 공동체’를 이루는데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혼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해결책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답변보다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왜’ 성적인 존재로 만드셨는지를 그 창조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서 성찰해 보도록 초대하신다.
지난번 필자의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인간이 성적인 존재로 창조된 이유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과 쾌락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동질의 인간성을 함께 나눌 상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반대성과 만나 한 몸을 이룬다 함은 단순히 성적인 결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한다. 부부 상호간에 진정한 인격적 나눔 없이 단순히 성적인 나눔 만이 존재한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한 몸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느님의 창조의지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학자인 송봉모 신부에 의하면, 구약성서에서 거들짝을 의미하는 ‘애째르’는 하느님이 인간을 ‘거들어주다’에서도 사용되는 단어로써, 이는 호혜적(互惠的)관계를 가리키는 단어이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아담을 돕기 위해 동등한 관계의 이브를 창조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남자는 외친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창세 2, 23).
성적인 존재로 탄생된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국사회의 이혼사유로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격차이에 의한 갈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원조 아담과 이브가 이루었던 한 몸 공동체는 서로의 신뢰와 인격적인 상호존중이 보장되는 은총의 공동체였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벌거벗음’은 자신의 약점과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창조된 직 후 아담과 이브가 서로의 벌거벗음을 바라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내적평화의 체험이었다. 이것은 은총의 체험이었으며, 서로의 몸이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체험이었다.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고 함은 서로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서로를 가식 없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서로를 줄 수 있는 인격의 나눔이 형성된다.
하지만 이 은총의 공동체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신뢰가 불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죄로 인해 서로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탓을 남에게 돌리게 되었다(창세 3, 9~12참조). 결국 죄의 속성은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탓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혼사유로서 제시된 ‘성격차이’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서로를 받아들임에 인색한 탓이 아닌가 싶다. 먼저 서로를 받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부는 서로의 몸이 서로에게 은총의 선물이 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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