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타협할 수 없는 가치”
로마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추석을 맞이해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교포신자 집에 저녁을 초대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추석을 맞이해서 오갈 곳 없는(?) 나를 불쌍히 생각한 것 같다.
초대 받은 집에 도착해 보니 거기엔 내가 아는 여러 가정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송편에다 불고기와 된장찌게, 타국에서 쉽게 먹을 수없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모두들 배불리 먹고는 고향 이야기와 보고 싶은 부모님, 형제들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다. 그러다 갑자기 집 주인이 무언가를 서랍 속에서 끄집어냈다. 다름 아닌 ‘화투’였다. 추석을 맞이해서 고스톱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고스톱을 치기도 전에 두 시간이나 진지한 논쟁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서로가 알고 있는 고스톱 규정(?) 내지는 법칙에 대한 ‘합의’를 위한 토론이었다. 왜냐하면 고스톱의 법칙이 각 지방별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의 토론 끝에 결국 ‘합의’를 본 사람들만 고스톱에 참여했다. 이렇게 ‘합의’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고, ‘합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 신법에 근거
교회는 무엇보다도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특히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진리는 교회가 2000년 동안 지켜온,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 나가야 할 진리중의 진리이다. 그래서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 성인성녀들은 교회의 진리를 선포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도 바쳤다. 진리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무엇보다도 자연법, 곧 신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진리는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나아가 진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정치적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진리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하고 그 무엇과 타협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역은 인간이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합의’의 영역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오늘부터 우리는 인간 생명을 존엄하지 않다고 합의 하였다”고 해서 인간 생명이 존엄하지 않은 것도 아니요, 또 “인간배아는 단지 세포 덩어리일 뿐이다.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배아를 조작하고 실험하고 복제할 수 있음을 합의 하였다”고 해서 인간배아가 생명이 아닌 것이 아니다. 이름난 생명과학자 몇몇이 우겨댄다고, 정부의 권력으로 밀어붙인다고, 몇몇 사람이 짜고 합의한다고 해서 진리가 진리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오로지 진리 일뿐이다. 진리는 시대적 상황이나 합의로서 타협될 수 없는 영원불멸하다.
‘합의’가 ‘진리’인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는 수많은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 단체들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든 정치적 집단이나 혹은 경제적 목적을 위해 만든 경제적 단체들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자신들의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NGO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각종 사회단체들은 오로지 ‘합의’가 목적이다. ‘합의’만 이루어지면 그것이 언제나 옳은 것이고 그래서 주저함 없이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사회적 여건이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뀌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합의는 실정법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도, 형법도, 민법도, 도로 교통법도 그때그때마다의 필요성에 의해서 개정하기도 하고 아예 없애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합의’가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이다. 국민들 대다수의 의견을 모아 ‘합의’를 하였다고 해도, 여론조사를 통해 대부분의 의견이 어느 한 쪽 방향으로 모아졌다고 해도 그건 단지 ‘합의’일 뿐이지 결코 ‘진리’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다수결의 원칙’이다. 어떤 법을 만들거나 국가의 정책을 결정 할 때 무조건 다수결의 원칙 내지는 대중의 선호도만 가지고 결정한다면 엄청난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의 영역’과 ‘합의의 영역’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진리를 버리고 합의만을 따르게 되고, 그 합의가 진리인양 착각하게 된다.
배아가 생명임은 진리
그런데 가끔씩 몇몇 국가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과학자들에 의해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본다. 특히 최근에 벌어진 황우석 박사의 ‘난치병 환자를 위한 배아줄기세포 배양’이 그 사례다. 정부관련 부처와 황우석 박사 연구팀은 물론 언론까지 합세하여 마치 인간배아가 생명이 아닌 것처럼 속이고 있다. 난치병 치료제 개발이라는 타이틀만 부각시켜 인간배아가 생명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세포덩어리일 뿐이라고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진리인양 말이다.
사실 인간배아에 대해서는 생명과학자들 간에도 그 의견이 분분하다. 이것은 합의할 사항도, 합의될 수도 없을뿐더러 생명과학자들 간에도 전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배아가 생명이 아닌 것처럼 취급당하고 있다. 소위 몇몇 사람들에 의해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과연 인간 생명의 영역이 합의의 영역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생명에 관한 규정이 고스톱의 규정 따위와 동일시 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생명에 대해서 몇몇 사람들의 의도된 합의로만 나간다면 우리의 앞날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이 아무리 인간배아가 단지 세포 덩어리일 뿐이라고 우겨도 인간배아는 인간생명일 뿐이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거짓이 진리를 이길 수는 없다. 진리는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그 누구와도 합의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오로지 진리일 뿐이며 영원불멸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러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요한 18, 37)
이창영 신부(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위원·본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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