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억하는 이유는 복수가 아닌 화해·치유 위한 것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한번쯤은 교통법규 위반 사실 통지서(일명 딱지)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꽤 오랜 기간 동안 딱지 받은 장소를 잊지 않는다. 그 다음에 그 앞을 지나 갈 때는 딱지 받은 과거를 기억해서 속도를 줄이고 조심을 한다.
만일 과거를 잊어버린다면 똑같은 실수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저지를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기억해야한다. 시험을 치른 후에도 틀린 답에 대해서 틀린 원인과 정답을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같은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
인생에서 오는 많은 사건들 특히 고통스러웠던 부정적인 것들 중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고 기억하지 말고 잊어야 할 것이 있다. 그런데 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반대인 경우를 많이 본다. 잊어야 할 것은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잊고 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망각과 기억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천년 전의 출애급 사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한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말귀도 못 알아듣는 귀에다 대고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하심과 선조들의 쓰디쓴 노예생활을 알려준다고 한다.
작년에 유럽 여러나라를 배낭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히틀러 나치스의 만행이 기억되고 있었다. 폴란드의 크라코브 인근에 있는 그 유명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 학살의 참혹한 현장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치스의 만행에 희생되었던 나라들 뿐 아니라 나치스의 본 고장이요 가해자였던 독일에도 곳곳에서 자신들의 과오를 기억한다.
얼마 전 독일에서는 나치 점령의 전초 기지였던 브루덴부르그에서 나치로 인해 희생되었던 유태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대규모로 세워졌고 그 밖에도 많은 곳에 기념관이 있다. 또한 학교 교과서에도 나치스의 만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사진과 자료, 희생자에 대한 배려와 뉘렌베르크 전범재판에 이르기까지 조심스럽게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엘리 위젤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한 다짐 “내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인간성의 이름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모든 공적 슬픔과 분노를 대변하면서 공적 망각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과거의 과오를 감추려하지 않고 끈질기게 상기함으로써 과거의 부담을 줄이고 유사한 과오를 예방하기 위한 독일국민의 역사의식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한가? 임진왜란은 고사하고 일제 식민지시대의 암울함에 대하여, 박정희의 유신 독재와 인권 침해에 대하여, 기타 어두웠던 과거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는 30년 전에 일어났던 과거를 지금까지 기억한 효과와 보람이 나타났다. 1월 23일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된 인혁당 사건 관련자 16명이 사건 발생 30여년 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 의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지난 몇 달 동안 전 국민을 우롱하고 난치병 환자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었다가 절망시킨 황우석 교수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황우석의 인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특별히 그의 반복된 거짓말과 조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 하는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면 또 거짓말을 하게된다. 범죄자에게 기회를 또 주면 그 기회는 악용되어서 돌아온다. 틀린 문제는 다음번에 또 다시 틀리기 마련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이유는 아픈 과거를 들추어내어 상처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하고 치유 받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지금 고치지 않고 확인하지 않으면 미래의 세대가 또 똑같은 문제에 당면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과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용서 때문이고 용서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잊어버려 줌” 때문이다. 정의에 어긋난 그 어떤 사랑도 용서도 “잊어버려 줌”도 진정한 사랑과 용서가 아니고 해결책이 아니고 예방책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 잊어서는 안 될 것과 잊어야 할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주시고 특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소서. 아멘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