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끊임없이 증언하고 실천하자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라웠다. 유치원에나 다닐까말까 한 어린 아이가 또래 여자 아이에게, 그것도 공중파 방송에서 하는 말이다. 남녀 사이에서 오가는 사랑의 표현이란 “오로지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 내가 알았던 기본 틀이었다. 혼인성사 안에서 배타적 독점과 영원 불변성을 전제로 하여야 이른바 완전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배운 사랑의 윤리였다. 그런데 그것은 당위일 뿐, 현실에서는 어린이들도 그러한 당위의 틀을 당연하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무슨 완전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새 교황님께서는 지난 성탄절에 첫 회칙을 발표하셨는데(‘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2005. 12. 25.), 그 주제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었다. 보편 교회의 목자로서 전 세계 신자들을 이끌어 나가실 새로운 지도 방향을 제시하리라는 첫 회칙에 대한 기대로 미루어 보자면, 그 주제는 너무 진부한 것이었다. 너무나 자주 또 너무나 여러 가지로 써 왔던 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사랑이니,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 논리 전개는 간단명료하다. 이 ‘사랑’이라는 말이 가장 자주 쓰이면서도 여러 가지 다른 뜻으로 가장 잘못 쓰이는 말이라고 하면서, 용어 정의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상의 경험에서, 사람들이 무심코 잘못 쓰는 말을 지적하거나 고치자고 하면 어떠한 자리에서든 그 대화는 즉시 중단되고 만다. 모두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아예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썰렁해지도록 상하게 한 죄를 뒤집어쓰고 물러서야만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그냥 함께 잘못 쓰자는 체념을 앞세우고 만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전례에서도 우리는 어쩌면 그 말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하고, 그저 다 좋은 말이겠거니 하고 지나간다. 어떤 기도문에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빌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도 있다. 그래서 말에 걸려 기도를 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그렇다고 말마디만 따지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사랑이 무엇이냐를 두고 논의하고 또 싸우기까지 하였다.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로 사랑을 하다 죽었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유럽의 문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사랑에는 그리스 말로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가 있다고 한다. 이 셋이 서로 다르다고도 한다. 히브리말 성경을 그리스말로 옮긴 칠십인역을 보면, 주로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쓰기는 하지만, 이 세 가지 말을 별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자기 누이 타마르를 욕정으로 겁탈하였던 그 사랑도 아가페라 하고(2사무 13, 1.15), 탕녀가 유혹하는 말에서도 필리아와 에로스가 함께 쓰인다. “자, 우리 아침까지 애정(필리아)에 취해 봐요. 사랑(에로스)을 즐겨 봐요. 남편은 집에 없어요. 멀리 길을 떠났거든요.”(잠언 7, 18~19)
니체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죽여버렸다고 비난하지만, 어떤 교부학자들은 마르키온이 아가페를 너무 내세우다가 이단의 괴수라는 낙인이 찍혔다고도 이야기한다.
교황님은 에로스와 아가페의 종합을 다시 이야기하신다.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 갖는 사랑과 주는 사랑을 다 알고 체험하고 실천하여야, 영혼과 육신을 지닌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맨 정신으로 자기만을 찾아서는 어려운 일이다. 정신이 나가야 황홀경에 이를 수 있다. 에로스에는 하느님을 찾아 오르는 힘이 있지만, 그 말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나 통속적인 개념에서 정화되어야 할 것이다. 아가페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내리 사랑이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완전한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바로 사랑이심을 온 세상에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 주어야 하고,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는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물질주의에 젖은 이 세상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이 비록 정신 나간 바보짓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바보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끊임없이 증언하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고을고을 떠도는 바보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외치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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