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회 양극화·자선의 형식화 등에 새로운 메시지 던져야
얼마 전 인터넷에서 ‘지하철 결혼식’이란 동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문과 방송에도 크게 보도가 되고 많은 네티즌들이 감동의 댓글이 올렸대서 일부러 그 장면을 찾아보았다. 1분가량의 짧은 화면이었지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고아로 자라나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를 형편이 못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하철에서 결혼식을 치른다는 사연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신부의 모습이 잔상처럼 마음에 남았다.
대체 우리네 사는 일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보면서….
며칠 뒤 그 장면이 사실은 연극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펼친 일종의 상황극이란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일순 허탈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애초의 감동이 좀 바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들의 사연에 감동의 글을 남겼던 네티즌이 거꾸로 분노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굳이 그럴 것까지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티즌들이 화를 낸 것은 자신들의 감동이 놀림(?)을 받았다는 씁쓸함 때문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애초에 그 사연을 접하고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감동에 목말라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환한 웃음을 짓던 청년의 모습과 힘차게 포옹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네가 발견한 것은 소박함과 순수함, 그리고 미래에의 희망이 아니었겠는가.
우리네는 그들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던 게 아닌가. 춥고 헐벗었던 어린 시절이, 단간 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젊은 날의 추억이, 그리고 살아갈수록 더해가는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새 날을 시작한 풋풋한 청춘들에게 목메도록 감동하고, 그들의 모습에 우리 자신의 희망을 의탁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가 픽션으로 결말난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그런 해프닝을 통해서나마 우리네 마음이 아직은 완전히 메말라 있지는 않다는 것, 우리네가 아름다운 장면 앞에서 언제든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밖에. ’지하철 결혼식’은 허구였지만, 이 세상에는 그 사연만큼 애틋하고 가슴 아픈 진짜 세상살이의 이야기들이 많을 터이다.
어쨌거나, 요즘의 화두는 ‘양극화’라고 한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치하는 이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양극화 해소’라는 구호이니 심각한 문제이긴 한 모양이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해지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을 터이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 서울과 지방의 격차,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격차…. 나아가 그 같은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새로운 양극화를 재생산하고 있다. 돈 있는 사람은 부동산 투기를 통해 또다시 떼돈을 버는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부유한 이들이 자식들에게 족집게 과외를 시켜 명문대학에 보내는 교육기회 불평등의 심화….
특급 호텔에서 수천 명의 하객들을 초청해 벌이는 결혼식이 존재하는 한, 허구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지하철 결혼식’이라도 치러야 할 가난한 선남선녀들이 실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해외여행에서 값비싼 명품들을 사들여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기사의 바로 옆에 토끼장 같은 쪽방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의 사연이 함께 실리는 세상이 아닌가.
‘양극화의 해소’는 우리 사회의 절실한 현안이지만, 그것은 정치인들의 입 밖을 맴돌다 사라지는 공허한 구호일 뿐 아직까지는 사회적인 반향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압도적으로 휩쓰는 세상에서 경쟁의 논리, 강자의 논리가 더욱 거세지는 세월이 아닌가. 모두다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할 뿐 공동체적 나눔으로 이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 자신도, 교회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이다. 교회의 중산층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지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런 걱정이 교회공동체에서 불식되고 있다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자선도, 교회의 자선도 점점 더 형식화되고 있다는 느낌은 과연 기우일까.
자선만의 문제도 아니다. 독재 시절 가톨릭교회가 한국 민주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듯, 약육강식의 비정한 논리가 휩쓸고 있는 우리 사회에 교회는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야 하지 않을까. ‘양극화 해소’는 단순히 정치적, 정책적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적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하철 결혼식’은 인터넷을 떠돈 가공의 이야기이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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