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 폐지의 당위성
“보복 살인이자 제도적 살인”
들어가는 말
인간 존엄성의 핵심은 인간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 생명은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인위적으로 박탈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범죄 예방이라는 명분으로 아직도 시행되고 있는 사형제도는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오늘날 사형제도의 존속이 범죄를 예방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가정일 뿐이며, 그 실제적인 영향은 전혀 미지수이다. 따라서 이제 범죄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꼭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물으면서 우리 모두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원수와 보복의 문화를 사랑과 자비의 문화로 바꾸어 나가야 하겠다. 사형이 아닌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공동선과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며, 비폭력 원칙, 생명 보호와 같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폐지의 당위성
첫째, 사형제도 폐지 운동은 생명운동이다.
사형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로서, 가장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불명예스러운 형벌이다. 사형으로 폭력을 이길 수는 없으며, 이는 보복과 복수를 우선 순위에 놓는 행위일 따름이다. 그보다는 관용과 용서, 사랑과 정의의 실현으로 범죄자들이 진정한 회개를 통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형제도 폐지 운동은 단순히 사형수들을 살려주자는 차원을 넘어 오늘날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생명운동’인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사형제도에 대한 의견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최근 들어 종교계와 정치계의 노력으로 무려 과반수가 훨씬 넘는 175명이나 되는 현 국회의원들이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입법청원을 하면서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더욱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이 50%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감형이 전제되지 않는 절대적 종신형이 그 대체형으로 도입될 경우 거의 70%가 사형제도 폐지에 동의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3월 25일에 발표한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 사형은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하는 경우에조차도 사형제도에 대한 공적인 반대가 커지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제27항)고 지적하고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극단까지 가서는 안 된다"(제56항)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제30차 세계평화의 날 담화(5항)에서 교황은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형벌이든 범죄자들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말살할 수는 결코 없다”면서 “회개와 갱생의 모든 기회가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나아가 교황은 제35차 세계 평화의 날(2002년 1월 1일) 담화문에서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다”는 제목으로 이 시대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필요한 것은 정의와 용서하는 사랑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이는 사형제도 폐지 운동이 단순히 사형수의 생명만을 살려 주자는 차원을 넘어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진정한 ‘생명운동’과 ‘평화운동’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둘째, 사형제도는 국가에 의한 ‘보복 살인’이자 ‘제도적 살인’이다.
사형제도는 또 다른 살인인가? 아니면 범죄 예방 효과를 위한 국가의 사회보호 기능으로서의 필요악인가? 1963년 대법원에 이어서 1996년 헌법 재판소는 합헌 결정(“사형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범죄에 대한 응보 욕구가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으로 여전히 제 구실을 하고 있다”)을 내리면서 그러나 “시대 상황이 바뀌면 사형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단서를 붙였다.
사형제도는 무엇보다도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생명권을 국가가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에 의한 보복 살인’ 내지는 ‘제도적 살인’이다.
따라서 국가가 어떠한 명분으로도 주권국민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것이다(주권론). 엄격히 말하면 이것은 범죄자의 범죄행위 이전의 문제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과 범법자들을 벌할 국가의 권리는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고 회복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고 이것은 분명 공동선의 매우 중요한 측면을 이루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공동의 안녕을 비행이나 범죄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예방(Deterrence)’, 법질서와 정의의 침해는 배상과 속죄를 요구하는 ‘응보(Retribution)’, 범죄자들이 그들의 방식을 고치고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교육시키는 ‘개선과 교정(Reformation)’을 위해서 국가는 형사재판권을 가진다.
그렇지만 국가의 형사재판권이 반드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국가의 권리를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날 인도주의의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형벌이론의 모순에 의해서도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사형제도 존치 국가들의 범죄율 통계보고에 따르면 사형제도로 인한 범죄억제의 효과는 증명되지 못하고 있고, 보복이론은 그 자체로서 문제시되며, 그리고 현대 국가는 빈틈없는 경찰력과 안전한 교도소가 있기 때문에 사형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오판으로 인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생명’이 오판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법의 판단에 따라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면 무엇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겠으며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사형은 구형하거나 선고하는 것도 인간이 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한계로서 오판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사형은 회복할 수 없는 형벌이며 사형이 집행된 후 오판이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회복하거나 구제될 수 없다. 실제로 오판은 사형 집행 전이나 집행 후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단 한 사람의 오판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 생명의 존엄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사형제도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이창영 신부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위원·본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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