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회사목 차원서 새만금에 보다 큰 관심을
기후학 이론 중에 ‘로렌츠의 나비효과’라는 게 있다. 이를테면 미국의 로키산맥에서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일으키는 미풍이 조금씩 조금씩 증폭돼 큰 바람이 일어나고 태평양을 넘어갈 때쯤엔 거대한 기류가 되며, 마침내 중국 베이징 상공에선 거대한 태풍이 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예측하지 못한 작은 원인이 엄청난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세상살이의 불확정성을 설명할 때 주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요즘은 생태이론의 근거로 자주 쓰이곤 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겨울에 조금 따뜻하게 보내겠다고 기름을 마구 때고,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겠다고 에어컨을 마구 켜면 대기오염을 유발하게 되고 그것이 다시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으켜 태풍과 홍수를 불러오는 것이 그 한 예가 될 터이다.
한 겨울에 먹는 딸기도 따지고 보면 자연현상을 거스른 인간의 욕심이 낳은 ‘기형의 열매’가 아니겠는가. 초여름이 제격인 딸기를 한 겨울에 먹으려면 온상에서 얼마나 많은 연료들을 태워야 하겠는가.
최근에 국무총리의 사퇴를 불러온 골프라는 운동도 그렇다. “이젠 골프가 대중스포츠가 되었으니 골프 치는 게 무어 눈 흘길 일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골프가 우리 사회의 대중 스포츠가 되었을까.
수천만 원짜리 회원권이 있어야 하고, 한번 다녀오는 데 이것저것 합쳐 20만~30만원의 돈이 드는 골프를 부담 없이 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 구경삼아서라도 골프장에 들어가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텔레비전에서 프로골프대회를 중계한다고 해서 골프가 대중스포츠가 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골프는 반환경적 속성을 가진 스포츠다. 길을 내네, 다리를 놓네 하면서 좁은 국토를 이리저리 깎아내 벌건 속살을 드러내 놓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채를 휘둘러 흰 공을 구멍에 넣는’ 놀이를 하느라고 온 산야의 수목을 깎아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게다가 잔디를 관리하려면 농약은 또 얼마나 퍼부어야 하나. 녹지를 기계충처럼 파내 골프장을 만드는 대열에는 행정기관까지 끼어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그러고는 관광산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자화자찬까지 한다.
하기야 어디 골프장만의 문제일까. 새만금 사업을 재개해도 좋다는 대법원의 최근 판결은 우리 시대의 삶의 가치관이 얼마나 황폐해 있는가를 총체적으로 보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판결의 의미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제 와서 공사를 중단하면 지금까지 퍼부은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것일 터이다.
물론 2조원이 넘는 돈과 십수 년의 시간은 아깝다. 그러나 단추를 잘못 채운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단추를 채우는 데 들인 노력이 아깝다고 계속 단추를 잘못 꿰겠대서야 될 말이 아니다.
갯벌을 메워 농지로 바꾸는 것은 금을 팔아 돌을 사는 짓이라는 환경단체와 지식인의 외침도 정부와 법원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생명의 정화작용이 막힌 인공호수를 만들면 제2의 시화호 꼴이 날 것이라고, 남아도는 농지 때문에 휴경제를 실시하고 곳곳에 공업용지를 놀리는 터에 막대한 돈을 들여 땅을 메워서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는 일리 있는 항변도 그들에게는 마이동풍이다.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의 고행의 삼보일배도, 정의구현사제단의 목멘 성명서도 결국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갯벌을 메워 거대한 탑과 놀이시설을 세우고, 흐르는 강을 막아 결국에는 썩어갈 호수를 만드는 우리의 탐욕이, 꿀맛에 취해 빠져 죽을 줄도 모르고 꿀통 속으로 한발 한발 빠져 들어가는 파리의 탐욕과 무엇이 크게 다를까.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있다.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그까짓 갯벌이 무어 대수냐”는 논리는 결국은 사람에게 부메랑이 되어 올 것임을. “지금껏 벌여놓은 일은 어쩌란 말이냐”는, 지난 세월 개발독재가 우리에게 강요해 왔던 ‘공범(共犯)의 논리’야말로 결국은 나비의 날갯짓이 될 것임을.
새만금에 대한 법원 판결은 나왔지만 이것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다. 지식인 사회도, 환경단체들도, 정부도 최선의 대안을 찾는 일에 다시 머리를 맞대야 할 터이다. 교회도 사회사목의 차원에서 지금보다 더 큰 관심을 보여야 할 때다.
지금은 우리 자신의 우리 마음속에 숨어있는 개발만능주의적 탐욕을 깊이 성찰해야 할 시간이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파괴하고서도 우리는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좋더라”는 창세기의 한 구절을 자신 있게 되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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