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깃발의 기수’ 되다
지난 3월 24일 로마. 아침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바티칸 광장은 추기경 서임식에 참가하려는 인파로 꽉 찼다. 드넓은 광장 한가운데 자리에 고운 색 한복 차림의 한국 사람들과 그들의 손에서 휘날리는 수많은 태극기를 보자 코끝이 찡했다. 설레는 마음이야 광장에서 추기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사제석에 앉아 있는 나나 매한가지였으리라.
마침내 웅장한 성가가 울려 퍼지고 바티칸 성당 회랑 끝에서 교황님과 함께 15명의 새 추기경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나라 출신의 추기경이 지나가자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니 누구의 나라 할 것 없이 감격스러웠다. 특히 광장 한가운데서 휘날리는 붉은 오성기는 시대의 많은 변화를 실감케 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드디어 진홍색 수단을 입은 백발의 정추기경님이 보였다. 한국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기자 회견 때 정추기경의 말씀을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카디널 니콜라오 정진석” 교황님의 호명에 주케토와 비레타를 받기위해 정추기경님은 단상으로 걸어 나가셨다. 홀로 서 계신 그분의 뒷모습을 보자 나는 기쁨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추기경이란 자리가 결코 영예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광장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다 문득 한 신문에서 정 추기경님을 ‘깃발없는 기수’라고 부른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사실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을 빌리자면, 정추기경님은 깃발없는 기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깃발의 기수’가 되신 게 아닐까. 이제 그분은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또 다른 하나의 악의 깃발을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상대의 집중 공격을 감수하며.
추기경 서임 발표 후 사석에서였다. 정추기경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가 너무 많아 그 책임감에 두렵기조차 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클수록 그 기대를 충족하기 어려워 실망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갖는 책임감도 상상을 초월하는데 하물며 나라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그것은 얼마나 더 클 것인가. 그러나 정추기경님은 이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진해야 한다.
전진하면 할수록 악의 세력의 역풍과 공격을 받게 되겠지만 또 한편 그분께 직접 깃발을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과 능력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작은 위로가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정추기경님의 별명이 몇 개 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 공개된(?) ‘이면지의 제왕’외에도 숫자의 비상한 기억력 때문에 붙여진 ‘쌍타 누메루스’가 있다. 또한 거의 매일같이 정확한 일상 시간표 때문에 ‘칸트’라 불리기도 한다. 그분의 행동을 보고 시간을 맞춘다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이제 그분은 또 하나의 별명이 생겼다. ‘그리스도 깃발의 기수.’
악의 공격과 역풍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깃발이 우리 사회에 더 세차게 휘날리기를 기원한다. 기수의 존재만으로도 용기백배하는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정추기경님이 성실한 기수가 되어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사진설명
정진석 추기경과 로마 한국 신학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허영엽 신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