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기쁨이 없는 삶은 죽음”
어느 날 철학자 막스 쉘러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내일은 죽음에 대해서 강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많은 학생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고 흥분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어 온 한 교직원이 이런 말을 전했다. “그분은 방금 운명하셨습니다.” 사실 그는 그 날 아침 식탁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生)과 사(死)의 문제일 것이다.
생은 지금 당하는 일이고, 죽음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장차 당해야 할 일이다. 또한 죽음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모두 당면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막연한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 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머리 숙여 눈물만 흘리는 것은 아니다. 며칠 후에 장례를 치르고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 돌아설 때 우리 머리 속에는 인생의 깊은 문제, 본질적인 문제를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사람이 죽고 나면 사후 세계가 정말 있는가?” “정말 우리는 죽음의 터널을 통과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가?”
“죽음은 진정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가?”
우리는 이와 같이 인간의 영생과 내세에 관한 관념은 비록 희미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어떤 종교 가운데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황천에 간다고 하였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땅에 묻기 전에 입에다가 돈을 한 입 넣어주었다.
이는 죽은 사람이 강을 건너 딴 세상에 간다는 사상 아래 뱃사공에게 뱃삯을 주라는 의미의 풍습이었다. 또한 철학자 플라톤과 치체로는 철학적 견지에서 “영혼은 불사불멸하며 반드시 살아있다”고 가르쳤다.
죽음은 아무도 연습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어떤 설명도 우리의 경험에 보탬이 될 수는 없다. 죽음은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죽음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수정할 기회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과연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진정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삶, 곧 다른 삶의 형태가 계속되는 것인가? 조사(弔詞)에는 죽음을 두고 늘 ‘명복을 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은 뒤의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인가? 만약 죽음으로써 인간의 삶이 완전히 끝나버린다면 차라리 죽음 앞에 축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괴로운 세상 일찍 잘 가셨습니다” 혹은 “이렇게 일찍 가시다니 부럽습니다. 축하드립니다”하고 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인간 역사 안에서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흔쾌한 대답을 준 사람은 없다. 나아가 죽음을 직접 경험 해 보고 죽음을 물리친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오로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
그러나 부활의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알 수 없다. 다만 하느님의 계시로써만 알 수 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서는 “죽은 자들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깨어 영생을 얻을 자도 있겠고 수육을 받아 무궁히 두려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공박에 대해 예수님은 탈출기 3장 1~6절을 인용하여,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으로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의 현실과 희망을 야이로 딸의 부활과 나임 과부의 아들, 나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군중들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나아가 예수님 자신의 부활로써 자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믿는 사람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중대사를 해결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의 큰 신비를 깨닫게 하여 인간 삶의 가치를 최대로 성화 시켜 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부활이며 생명으로서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인생가치가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되리라는 확신과 보증인 것이다.
톨스토이가 남긴 ‘죽음에 관한 시’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출생할 때 그대는 울었으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을 것이고, 그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은 슬피 울 것이나 그대는 미소를 띠우리라.”
그런데 정말이지 궁금하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까? 부활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까? 희망과 기쁨이 없는 삶, 그것은 죽음과도 같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이창영 신부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위원·본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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