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바랜 사진첩
아주 가끔이지만 대청소에 나설 때가 있다. 먼지, 더러움, 때에 익숙한 체질이지만 간혹 이보다 더 더러울 수는 없어서, 참을 수 없는 먼지의 무거움에 청소를 강요받기도 한다.
구석마다 박제가 된 먼지를 걸레 조각을 날 세워 쪼아내다 문득 생각이 나면 꼬깃꼬깃 처박힌 졸업장이며, 개근상장, 양가가 우수수한 성적표까지 들척이다 보면 하루해가 후딱 지난다.
이렇게 개인사를 뒤적이는 일 중에서도 백미는 역시 색 바랜 사진첩을 들추는 일. 70년대 삼류극장 간판처럼 옛날 사진의 총천연색은 어찌 그리 원색인지. 내가 얼마나 촌스러웠는지를 느끼려면 옛날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 이상이 없다.
하지만 옛 추억의 촌스러움은 나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던한, 심지어 포스트 모던한 세련미의 연예인들도 1, 2년 전 모습은 촌티에 촌닭 자체이다. 미모야 그때도 출중했겠지만 시간의 역진행이 깍아 먹어 덜 떨어진 세련미는 마찬가지이다.
한데 재미있는 일은 그 촌스러움이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옛 사진은 얼굴을 붉히게 하면서도 자꾸만 다시 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사진이 사진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의 응축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촌스러움은 버릴 것이 아니다.
촌티의 극치
교회는 자주 촌스럽다. 때로는 촌티의 극치를 달린다. 이미 세상은 과학의 힘을 완전히 믿고 있는데 교회는 과학이 하느님이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으로 제한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현대인은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순간의 선택을 스스로에게 충분히 허용할 만큼 쿨한 존재인데도 교회는 구태의연하게도 결혼은 일수불퇴이고, 남녀는 일부종사해야 한다고 믿는다.
주5일제로 금요일 저녁부터 연휴, 놀기도 바쁜데 미사 나오라고 가가호호 방문까지 다니는 오지랖 넓은 짓을 교회는 여태 하고 있다. 누구든 자신을 절제하고 수련하면 훨씬 더 바람직하고 자립적인 인간상을 창조하고, 스스로 거기에 참여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음을 요가나 기 수련 같은 걸 한 번 해보면 잘 알텐데, 여전히 뜬 구름 잡는 식으로 하느님 은총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이다.
촌스러움의 절정은 이른바 봉헌된 삶, 자기를 완전히 헌신하는 수도자, 성직자,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평신도들이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유행은 돌고 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유행은 복고주의이다. 전에는 탈피하려고 했던 촌스러운 복고풍이 첨단의 시대에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곤 한다. 사람들은 디지털이 앗아간 인간미를 아날로그로 되찾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가끔 촌티가 세련미로 극복해야 할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세련되고 쿨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참으로 세련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많은 현대인들은 어쩌면 종교나 신앙이 촌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권고하는 가르침들은 구시대의 유물이고 얼마든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촌티 나는 요소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세련미를 갖추어야 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교회의 정체성
하지만 촌스러움을 모두 잃어버릴 때 우리는 자칫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내 오래 전 사진들은 촌스럽기에 내 지나온 삶의 발자취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사진들을 모두 내다 버린다면 그것은 내 삶의 진실들을 내던지는 일이다. 교회가 촌티를 벗으려고 세상과 야합할 때, 교회는 정체성을 잃고 만다. 특히 그 촌스러움이 그저 모양새가 아니라 정신에 관련된 것일 때 더욱 그러하다.
박영호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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