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정부 정책 감시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최선을
최근 세속 언론들은 이른바 ‘론스타 파문’과 ‘현대자동차의 비자금 비리사건’을 떠들썩하게 다루고 있다.’론스타 파문’은 미국의 투기자본 론스타가 경영난에 빠졌던 외환은행을 인수해 경영을 호전시켜 놓았다며 비싼 값에 되팔려 하면서 생긴 일이다. 4조 5천억 원에 이르는 시세차익을 가져가는데도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는다는 울분 섞인 여론이 비등했다. 게다가 검찰과 감사원이 조사를 해보니 외환은행 직원과 금융감독원 등 정부 관리들이 한 통속이 돼 외환은행의 경영난을 과장함으로써 헐값에 은행을 외국자본에 넘겼다는 의혹이 속속 튀어나오고 있다.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이란 것은 재벌회장이 아들에게 경영권 이양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계열사의 주식을 부정한 방법으로 사들였다는 의혹이다. 이 과정에서 정관계와 금융계에 뇌물 로비를 벌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은행은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자금을 빼돌려 이 재벌회사의 빚을 갚아주는데 썼다고도 한다.
4조 5천억 원이란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재벌그룹이 조성했다는 수백억 원의 비자금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진 돈인지 우리 같은 장삼이사로선 짐작할 수도 없지만 신문기사를 읽고서 분노하지 않은 국민은 드물었으리라.
따지고 보면 빼돌려진 돈은 국민, 그리고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이 아닌가. 세상이 예전보다는 많이 맑아졌다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선 서민들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불법이 판을 치고 있다는 새삼스런 한탄도 흘러나오게 된다.
신문기사를 읽으며 이 땅에 경제정의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오래된 의문을 반추하는데 문득 교황 레오13세께서 반포하신 회칙 ‘새로운 사태’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한 계층은 굉장히 부유하여 막강한 세력을 지닌다.
…국가의 운영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른 계층은 가련하고 힘없는 수많은 대중이다. 이들은 생활고에 쪼들려 마음이 조급하고 항상 소요에 쉽사리 휩쓸린다.” ‘노동헌장’이라고도 불리는 회칙 ‘새로운 사태’가 나온 1891년은 서구에서 마르크시즘이 노도처럼 휩쓸던 시기였음은 주지하는 바다.
산업화에 따른 노동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공산주의 혁명의 불길이 치솟던 때에 가톨릭교회가 자본주의의 탐욕을 경계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한 회칙을 발표한 것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회칙이 나온 이후로 교회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자기증식을 무한히 반복하는 자본주의적 탐식을 비판하면서 세상의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복음정신을 펴왔던 게 아닌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새로운 사태’ 반포 100년을 기념해 1991년 반포한 새 회칙 ‘백주년’에서 민주적이고 준법적이며 인간학적으로 건전한 형태의 자본주의 형성을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도 그것이 현대 사목의 중심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게다.
50~60년대의 절대 기아에서 벗어나 고도산업국가로 발돋움했을 뿐 아니라 풍요한 물질문명을 누리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겉모습이다. 그러나 일견 풍요한 외양과는 달리 우리 사회는 내부적으로는 숱한 고질을 앓고 있다.
정치인들과 거대 기업의 부패 고리는 아직도 완강하다. 대기업의 정규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으며 중산층으로 편입돼 가는 반면, 갈수록 늘어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다. 무너져가는 농촌 경제에다 도시 빈민의 고달픔도 여전하다. 게다가 외국인노동자의 시름도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있다.
70~80년대 교회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를 선도했을 뿐 아니라 노동과 빈민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세상의 소금이었다. 다수의 사목자들이 노동현장에서 투신해 노동자들의 편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교회가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사회사목에 소홀해진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면 철없는 평신도의 불평이 될까. 그러나 겉보기엔 멀쩡해도 속이 곪은 상처가 더 위험한 법이다. 모두가 가난하면 적어도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쌓이지 않는다. 적대감이 쌓이는 것은 상대적 불평등이 심화될 때가 아닐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한국 사회의 올바른 방향타 노릇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자본주의가 건전한 성장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계도하는 일, 그리하여 이 땅에 경제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새 길을 제시하는 것. 정부의 정책을 감시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것. 지나친 사회적 양극화가 해소되는 일에 앞장서는 것. 이것이 현대사회의 복음 전파가 아닐까, 부활절을 지내면서 떠올려 본 생각이다. 레오 13세 교황의 가르침도,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도 이 땅에선 아직도 유효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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