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시간째 두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손끝에 매달린 5단 묵주가 몇 바퀴를 돌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서울대학병원 창을 통해 비춰진 창경궁의 뜰에 핀 갖가지 꽃들이 서럽도록 아름답습니다.
거실의 유리문에도, 주방의 넓은 벽에도 온통 한지(韓紙)로 꽃을 만들어 피우고 좋아하던 아내입니다. 어쩌다 사는 옷까지도 꽃무늬만 있으면 곱다며 선뜻 사버리는 그 아내가 아름다운 꽃들을 보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오늘(4월21일)은 아내가 골수 이식을 받는 날입니다. 지친 아내의 혈관 속으로 골수가 한 방울 한 방울 들어갑니다. 40여년 국어선생이었던 나의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도록 감사한 어느 이름 모를 고마우신 분이 기증한 골수입니다. 골수가 아니라 생명 액입니다.
집을 찾는 제자들을 나보다 더 반겨하던 아내였습니다. 밤늦게 공부하는 제자들이 안쓰러워 커다란 들통 가득히 커피를 끓여주기를 마다않던 아내였습니다. 바깥일에만 몰두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두 몫으로 집안일을 하면서도 크게 불평하지 않고 참아주던 사랑하는 아내의 절박함 앞에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토록 절박한 상황 속에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또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 18)라는 성경말씀이 이처럼 절실히 다가오기는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아내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아내도 그동안의 삶을 깊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하느님의 사랑, 이웃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식수술을 받고 있는 절박함 속에서도 이 시간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함께하고 있음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더없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감사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기도주신 복음화학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점길 (요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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