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복음의 실천통해 자유와 생명의 가치 구현해야
대희년, 때맞추어 나에게 고난이 다가왔다. 젊음은 무모하리만치 나를 오만하게 키워왔고,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면 된다’라는 구호는 경제건설기 우리나라의 구호를 넘어서 나의 좌우명이 되어 있었고 나는 철저히 무신론자였다. 한 때 배워서 익힌 유물론이 그 바탕이 되었을 테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수한 열등감이 오히려 오만한 나의 외피로 커오지 않았나 싶다.
그런 나에게 1999년 고난이 다가왔다. 가장 친했고 마음 속에 좌표로까지 여겼던 친구를 순전히 나의 오만과 경솔함으로 잃었고, 그 여파로 새로 시작했던 출판일까지 접어야 했다.
나는 무기력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었고 불면증과 악몽이 수시로 나를 갉아 먹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하느님을 찾았다. 그동안도 가톨릭과 많은 인연이 있었고 함께 성당에 나가자는 숱한 제안을 받았지만 한 번도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밤, 내 발로 걸어서 성모님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내 죄의 용서를 빌었다. 구원을 원했다.
그렇게 나는 교리를 시작하고 기꺼이 나의 선택에 동의해 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대희년에 세례를 받는 축복을 누렸다.
그리고 지금 2006년, 나는 지난 3월부터 성당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 소위 냉담자가 되는 건 아닌지 두렵다. 부활 판공을 앞두고 밤새도록 고민했다. 지난 주에는 견진교리에 나오라는 수녀님 전화를 받고 또 고민했다. 나갈 수가 없었다.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 속에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가득 차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나의 냉담은 대안학교인 나섬학교 교사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이 사십이 되어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나면서 나는 걷잡을 수 없게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미사 중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미소가 싫어졌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겠다고 수도자가 되었으면서 관용과 낮춤이 없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모습을 보이는 분들이 미웠다. 그리고 그 모든 화살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 자신에게로 향해졌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 쏘아대는 화살에 맞아 비틀거리고 있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기적이게도 내가 간절히 무엇인가 의지하고 기댈 언덕이 필요해서 하느님을 찾았는데, 5년만에 나에게 언덕이 되어주고 안식을 주셨던 하느님을 원망하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가관이다.
함께 일하는 수녀님 한 분이 내 영성이 심히 걱정되었는지 책 한 권을 권해주셨다. 그 책 <왜 그리스도인인가>에서 한스 킹은 그리스도교를 ‘예수에 대한 기억의 활성화’라고 정의했다. 깊이 공감하며 지난 두 달여 동안 책을 읽었다.
성당에 다니는 동안도 나는 주로 정평위 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통해 실천적 대사회적 활동에 기대어 있었고, 나의 영성을 위해 특별한 배려를 한 기억은 없다. 두어 번 ‘이런 것이 종교적 체험인가’ 싶을 정도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중 한 번은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 품팔이 소년을 통해서였다. 그 가난하고 가엾은 소년을 보고 있는 내내 내 머리 속에서 예수님 형상이 떠오르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소년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며 ‘도대체 하느님은 그 소년을 통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걸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걸 보면 이것이 나의 첫 신앙체험이 아니었나 싶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성당을 나가지 않는 동안 한스 킹의 저작을 통해 나의 신앙적 의지와 행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감사할 일이다. 한스 킹이 말한 ‘예수에 대한 기억의 활성화’라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예수에 대한 기억의 활성화라는 것은, 남을 위하여 꾸밈없이 투신하며 불우한 사람들과 한 편이 되어 불의한 구조와 맞서 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억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의 활성화라는 것은, 예수님이 행한 상징적 기적들과 나눔과 섬김의 행동을 기억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의 활성화라는 것은, 예수님이 걸으신 고난의 길을 따라 걷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의 활성화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 정의 생명 사랑 평화와 같은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기억하고 활성화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는 기도와 복음의 실천을 통해 그 길을 가고 있다. 그 길은 결국 사람다운 삶을 추구하는 길이다.
분명, 신앙과 현실은 다르다고, 미사를 드리는 시간과 우리가 사는 공간은 다르다고 말해버리면 그만일 일은 아니다. 왜 기도하는가? 왜 미사를 드리는가? 왜 성경을 읽는가?
이렇게 정리해놓고 다시 물어보자.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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