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시일반’ 나눔 통해 질병 극복을
태풍 ‘에위니아’가 한반도 남쪽을 관통하면서 호남과 충청·강원 등 내륙을 가로지르며 전국에 걸쳐 강풍을 동반한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마치 하늘이 뚫린 것처럼 한번에 수십에서 수백밀리에 이르는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곳곳의 도로가 유실되고 애써 가꿔 놓은 농토가 물에 잠겨 엉망이 되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크고 작은 태풍이 올 줄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태풍이 오기 전에는 준비를 게을리 한 탓인지 모르지만 해마다 이 맘 때면 수해로 많은 이들이 아픔을 겪고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수천 억 원에 이르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나 자연 재해의 완벽한 예측이 불가능한 현재의 상황으로는 인간이 아무리 대비를 철저히 한들 그로 인한 피해를 전혀 안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커다란 자연재해를 겪고 난 연후에야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미물인지 자연은,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기도 한다.
우리네 사람의 몸에 생기는 일도 다른 세상사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건강할 때는 앞으로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을 것 같다. 그래도 사람들은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어 둔다. 또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피하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어디 사람 사는 게 그런가. 가끔은 술도 마시고 담배도 때로는 피워야지 사람 사는 맛이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미열이 좀 있고 감기가 걸린 것 같은데 잘 낫지를 않네. 일이 좀 많은가 내가 과로를 좀 했나? 좀 쉬어야겠는데. 뭐 푹 한잠 자고 나면 낫겠지. 근데 요사이 입안이 잘 헐고 잇몸도 자주 허는 것 같은데. 이를 닦다보면 양칫물 끝에 선홍색 핏물이 섞여 나오기도 하고. 병원에 한번 가볼까? 근데 시간이 있어야지. 할일이 산더미인데 언제 병원에 가지? 차일피일 시간이 그렇게 흐른다.
기침이 난다. 열이 난다.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는다.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이 피곤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내일은 꼭 병원에 가봐야겠다.
진찰실 밖 사람들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마치 비오기 전 하늘처럼. 내 마음도 예외는 아니다. 내 이름을 부른다. 마치 비좁은 성냥갑 같은 진찰실이다. 가슴을 걷고 청진을 당한다. 어디가 제일 불편한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뭐 심각한 것 같지 않은 질문을 당한다. 의사는 세로 줄이 쭉쭉 쳐진 종이에 뭐라 뭐라 적는 것 같은데 배울 만큼 배운 난데 맨 꼭대기에 적혀진 내 이름 말고는 알아 볼 수가 없다. 혈액검사를 하고 가란다. 검사 결과는 며칠 후에 나오고 자세한 이야기는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에 해준다고 한다. 피를 뽑힌다. 주사기에 빨려나온 혈액은 말간 유리 튜브로 옮겨진다. 내 몸 속에 저리 예쁜 색깔이 들어 있었나?
근데 저 선홍색 예쁜 피가 담긴 나는 왜 예쁘지를 않았지? 하여간 튜브에 담긴 내 분신을 혈액검사실에 맡기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혈액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을 기다린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은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면서 비가 올까 해가 날까 혼자 마음으로 점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혈액검사 결과를 보러가는 날이다. 앞에 앉아있는 의사선생님은 아무 표정이 없다. 무슨 쪽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리고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한다. 혈액 중에 림프아구가 증가하고 적혈구가 감소하고 어쩌구 저쩌구… 말은 한국말인 것 같은데 이해가 안 된다. 마치 외계어 같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간장과 비장이 커지고 뼈의 동통·구타통·안저변화·시력감퇴가 일어난단다. 또한 혈소판이라는 혈액 내의 세포가 감소되고 이로 인하여 코에서, 잇몸에서 또는 뇌에서 피가 나고 결국에는 죽게 되는 무서운 병인 백혈병이란다. 다행히도 치료법이 없는 것은 아니란다. 치료를 위해서는 독한 약물을 투여해야하고 수혈이 필요하고 궁극적인 치료는 조혈모이식수술을 해야 한단다.
약은 돈을 내면서 살수 있단다. 근데 약물 투여를 받으면 약이 너무 독해서 혈액내의 세포가 다 죽어버리므로 약물 투여를 받는 동안은 나와 혈액형이 같은 다른 사람의 혈액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치료를 받고 싶으면 혈액을 줄 사람을 나더러 구해오란다. 나는 너무 아프다. 나는 너무 힘들고 지쳐있다. 치료비도 만만치 않다. 치료비도 구해야 하는데. 피는 또 어디에 가서 구해야 하나?
집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긴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모두가 함께 새집을 짓고 다리를 복구하기 위해 삽질이 한창인 장면이 TV 화면을 가득 채운다. 수재로 재난을 당한 이들을 위한 돈을 모으는 모금 방송이 한창이고 모금 액수는 텔레비전 화면 옆모서리에 표시되고 수시로 그 수가 증가된다. 빨리빨리 많이많이 증가되었으면 좋겠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이렇게 함께 할 때 수월히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우리 주변에는 마치 폭우로 인해 천재지변을 당한 사람처럼 질병이라는 천재지변을 당한 많은 환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중병이라는 폭우를 뒤집어쓰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돈도 물론 필요하지만 때로는 특이한 것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들의 혈액이나 조혈모세포이다. 그러나 혈소판을 제공하는 사람을, 조혈모세포이식을 위해 골수를 기증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돈을 구하는 것보다 몇배 아니 몇십배 더 힘든 일이다. 그들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사람들이 생명을 나누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수재를 당한 사람들을 모두 함께 돕듯이 생명을 나누는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때로 환자나 그들의 보호자들은 돈을 구하러, 피를 구하러 길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생명이 당하는 재난도 수재로 무너진 다리나 집 못지않게 중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다. 이번 수해로 인한 재난을 함께 극복하려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생명의 재난인 환자들과 질병을 함께 극복하려는 모습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명희(생명윤리학박사, 마취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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