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이해와 애정의 출발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것이 내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 영화에 관심이 갔던 것은 <파이란>과 <역도산>을 만든 감독에 대한 신뢰와 기대, 그리고 원작자인 공지영 작가가 가톨릭신자이고 사형수와의 만남을 통해 교정사목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이의 아픔과 구원
송해성은 <파이란>에서 삼류 깡패와 위장결혼으로 불법 입국한 중국 여인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 사회의 폭력과 비루함 그리고 구원에 관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이 같은 감독의 성향과 원작자인 공지영 작가의 종교적 관점과 소신으로 미루어 영화에는 사형제도라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한 날선 비판이 잠복해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는 매우 감성적이었다. 많이 울렸다. 이지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었고, 비판보다는 감동을 택했다. 물론 이 영화가 ‘사형제 폐지’ 같은 주의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처 받은 이들의 아픔과 구원에 집중하고 있는 까닭에 감성적 접근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영화적으로야 <파이란>을 넘어서지 못하지만, 이 영화는 종종 그러한 평론가적 비판의식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요소를 통해 나누게 되는 연민 때문이다.
다른 이와의 진정한 소통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나 존재할 법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부분이다. 진정한 소통이란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동질감이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집안 좋고 유학 다녀와서 대학교수까지 하는 냉소적인 여자(이나영)가 고아원에 있다 뛰쳐나와 노숙하며 앵벌이로 성장기를 보내고 급기야 사형수가 된 남자(강동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남자가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이다.
아침 해를 보면서 희망차게 시작하는 사람들과 달리 수면제를 털어 넣는 여자와 감옥에 갇혀 하루하루 죽음의 시간을 맞으며 지내야 하는 남자는 ‘삶이 지옥’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지옥 같은 삶에서 이들을 구원해주는 것은 죽음에로의 도피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 치유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속내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아픔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나눈다.
서로의 아픔을 ‘들어주기’
영화 속 두 사람의 상처와 아픔의 치유는 ‘들어주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출발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대체로 우리는 이야기를 듣는 쪽보다 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토론 프로그램을 봐도 패널로 나온 토론자들이 자기 주장을 펼치기에 급급하다.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말 중에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뿐인가? 정치권에서 오가는 말들은 얼마나 선정적인 말들이 넘쳐나는가? 각 단체에서 발표하는 성명서들 역시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말들로 채워지기 일쑤다.
모두가 다투어 말을 쏟아놓는 데 열중할 뿐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만약 서로가 말하기를 줄이고 상대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상대에 대한 예의와 이해의 정도는 나아지지 않을까?
듣는다는 것은 명시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이들에게 가려져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또는 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여자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준 이는 그녀의 어머니이다. 사랑한 만큼이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그녀의 삶을 갉아먹고 그녀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언제나 묵묵히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 하느님이 계시다. 하소연과 불평과 엄살까지도 늘 들어주시는 그 분. 그래서 기도는 가장 큰 치유의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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