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주는 상처 감내하며 지속적인 교류 가져야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22년 지났고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4년 되었다.
신부되어 본당을 맡아 있을 때는 어머님을 내가 모시고 살았다. 실은 그 당시 내가 사목하던 성당의 한 달간 교무금 헌금 다 모아도 사제관 생활비도 안 되던 곳이었고, 그러다보니 시골 성당 주방원 둘 생각은 꿈도 꾸기 힘든 때였는지라 궁여지책으로 어머님을 부려먹은 셈이지만, 그래도 본당 교우들에게나 나를 아는 타지의 사람들에게나 형제들에게 내가 어머님을 잘 모시는 효자인 체 살았다.
10년 넘게 어머님과 사는 동안 명절마다 형제들은 내가 있는 성당 사제관으로 명절을 쇠러 왔다. 그 덕분에 어려운 시골 성당 살림에 눈꼽 만큼이나마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때에는 어머님이 형제들에게 용돈을 얻어 쓰셨고, 나도 어머님께 용돈을 얻어 쓰기는 하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머님의 용돈을 강탈하듯 빌린 적이 많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갚지를 못한 것이 미안하지만.
그런데 어머님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명절마다 서울 형님 집에서 한 번, 대전 동생 집에서 한 번 모이자고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장남인 서울 형님이 결정하시는 대로 모임의 장소가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이다. 어머님 살아생전에는 그렇지 않더니 어머님마저 돌아가시고는 형제간의 우애도 옛날 같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니 명절을 맞는 것이 그렇게 좋은 마음만은 아니다.
“출가외인이라는데, 사제직을 선택한 내가 언제까지 피붙이에 연연해야 하나? 이젠 멀리 할 때도 되었어”하는 도피성 망상이 자주 머리를 맴돌고 그래서인지 이즈음 명절에 형님이나 동생 집을 찾아 나서지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음은 늘 껄적 지근한 그 무엇이 짖누른다.
이번 추석은 대전 동생 집에서 보냈다. 서울서 모이기로 했다가 대전으로 바뀌었단다. 처음 집에 갈 때는 별로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우리 5형제가 다 모이지 않는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석 전날 밤, 모인 세 형제가 전어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을 나누며 오지 못해 만나지 못한 두 형제에 대한 섭섭함과 아쉬움 그 형제들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하는 자리에서 그래도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우리는 피붙이야!”
강물에 빠진 동생을 구한답시고 초등학생 형이 강으로 들어갔다가 주검이 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영실력도 없으면서 물에 들어간 용기가 놀랍기만 했는데, 이처럼 오기 전과 와서의 변덕이 죽 끓듯 뒤집히는 나에게도 형제애는 어찌할 수 없는 본능적 사랑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본당에서 혹은 다른 사목 현장에서 교우들과 아니면 다른 이들과 잘 지낸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하더라도 제 형제와 잘 지내지 못하는 신부이고 신자라면 것 꾸밈의 광대노릇의 신앙인이 아닐까? 정말 모처럼 형제끼리 모였으면서도 사랑과 기쁨을, 평화와 인내를, 친절과 진실을, 온유와 절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가 사는 사제직은 얼마나 슬픈 사제직일까를 묵상해 보았다.
계획대로였다면 이번 추석에 형제들을 만난 수 없었다. 개성에서 북측 사람들을 만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카리타스(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내년부터 국제카리타스의 대북지원사업의 집행국이 되어 북측사람들과 함께 긴급지원사업, 개발협력사업을 하는데, 나는 그 일의 집행책임을 맡게 되었기에 내년의 일을 북측 사람들과 계속 협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쪽에서 만남의 일정을 뒤로 미루자는 연락이 있었고 그 바람에 형제들과 오붓한 명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동생들과 만남에서 진한 형제애를 확인하고 다음 명절도 함께 소주 한 잔 하자고 약속한 날, 신문과 방송은 북측에서 며칠안에 핵실험을 할지도 모른다고 보도하고 있었고 주변의 많은 분들이 북쪽 놈들이 이제 갈 때까지 가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동안 북측사람들을 수십 차례 만났는데, 그동안의 만남을 반추하며 이번 추석에 채득한 바를 되씹어 보았다. 나는 그동안 그들을 참으로 나의 형제로 받아들였던가? 같은 민족이고 동포요, 배달형제라고 말하면서 과연 그들을 내 피붙이로 받아들였고, 형제로 받아들였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 받았을 때 미움이 오래 가듯이, 피붙이한테 상처를 밭았을 때 그 아픔이 오래 가듯이, 지금 북쪽 형제들이 우리에게 주는 상처는 우리가 감내하기 어려운 아픔이요 고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고 그들과 핏빛 인연을 끊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할까? 아니면 북쪽과 남쪽 사이에 성령의 열매를 꽃피우는데 앞장서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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