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성과지상주의에 매몰
우리나라에서 생명윤리 문제를 제기할 때 거기에 주어지는 사회적 관심은 매우 낮은 편이다. 그 대신 우리 사회에는 과학기술, 특히 생명공학 기술을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파악하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생각은 과학기술계, 산업계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회에도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대중매체는 생명공학 기술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와 경제적 부가가치를 보도하는 데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기사의 맨 끝에서 생명윤리 문제를 한두 줄 언급하는 게 고작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10~12위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데, 생명윤리 문제에 이르면 그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낯 뜨거울 지경이다. 작년 10월 19일 세계줄기세포 허브(World Stem Cell Hub) 개소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즉석연설을 통해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가지 논란이 훌륭한 과학적 연구와 진보를 가로막지 않도록 잘 관리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생명윤리 문제를 연구의 걸림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위정자의 의중이 밖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현재처럼 5년 단임 대통령 체제에서는 과학기술 정책도 4~5년 안에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과제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식으로 짜게 된다. 단기간에 성과를 보겠다는 욕심이 앞서다보니 생명윤리 문제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생각이 위정자와 관리들의 눈을 멀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일컬어 과학기술 성과지상주의(成果至上主義)라고 하는데, 이는 지난 40년간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 깊은 곳까지 뿌리박힌 생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생명윤리 논의는 다른 나라들의 그것에 비해 특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명윤리(bioethics)’라는 용어를 주조(鑄造)하고 이 분야의 논쟁을 선도해 온 미국의 경우 1970~80년대의 낙태 찬반논쟁, 1990년대의 안락사·의사조력자살 찬반논쟁을 거쳐 최근의 인간배아복제 찬반 논쟁으로 합중국 전체 여론이 양분되어 있다. 유럽도 대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웃나라 일본 열도를 달구어 온 생명윤리 논쟁은 의사-환자간의 인폼드 컨센트(informed consent) 및 유전자재조합 식품 문제를 둘러싼 그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생명윤리가 소개된 지 오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2000년 이후 생명윤리 논쟁을 이끌고 있는 주제를 고르라면 단연 생명복제 연구, 특히 인간배아복제 연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을 꼽아야 할 것이다. 생명윤리 분야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은 다양하고, 인간배아복제 연구 논쟁은 그 중 한 주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배아복제 연구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나라 생명윤리 논의의 가장 뜨거운 현장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의 여타 분야와 마찬가지로, 생명윤리 분야의 논의조차도 압축적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느낌이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한국 가톨릭교회는 우리나라 생명윤리 논의에 있어서 한 축을 담당해 왔다. 낙태, 안락사, 뇌사, 장기이식 등 생명윤리의 고전적 주제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담은 문헌들을 꾸준히 발간해 왔고,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위헌(違憲)임을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생명적 문화의 물길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는 그간의 노력을 폄하하려 함이 아니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한 해 전 서울대교구에서 발족된 생명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 차원의 생명윤리 논의 및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을 보면서 다행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기대를 걸게 된다. 지난 1970~80년대 암울했던 군사독재시절에 천주교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공로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형식적, 법률적 민주화가 완성된 지금, 한국 가톨릭교회가 생명윤리 문제들을 심각히 고려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선진 사회로 도약하기 위해,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 재정립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구영모 교수(울산대 의대·주교회의 생명윤리 연구회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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