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 존엄사 → 치료중단?
누구나 좋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 사고를 당하거나 병마(病魔) 시달리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린 후, 지나간 삶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 가운데 가족, 친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나는 죽음. 이런 게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좋은 죽음(good death)일 것이다.
그런데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다섯 명의 한 명꼴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오늘날 대부분 병원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과정은 추한 모습과 고통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육체가 무너지면 품위 있는 죽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도 따라서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무너지는 육체와 달리 심적 상태를 아름답게 유지해서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 삶의 종료에 관한 생명윤리적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첫째, 가장 널리 논의되고 있는 안락사이다. 둘째는 존엄사. 안락사의 대안으로 자주 논의된다. 셋째, 의료계에서는 안락사 또는 존엄사라는 용어 대신 말기환자의 치료 중단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안락사(安樂死)는 어원적으로 수월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가톨릭교회는 안락사를 강하게 반대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대량 학살을 자행하면서 ‘안락사’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이래 안락사는 역사적으로 저주받은 말이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이 용어를 입에 올리길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락사를 몇 가지로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 즉 환자가 이전부터 존재하던 질병이 원인이 되어 죽음의 과정에 들어섰을 때 그 진행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함으로써 안락사 시키는 경우를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라고 부른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이 유형의 안락사 역시 환자의 죽음을 의도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어떤 이들은 소극적 안락사의 의미를 더욱 좁혀서 존엄사(尊嚴死, death with dignity)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를 원한다. 식물인간 상태와 같이 환자에게 의식이 없고 그 생명이 단지 인공심폐기에 의하여 연장되고 있는 경우에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생명연장 조치를 중단하자는 취지에서다.
그런데 이 용어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1994년 미국 오리건 주가 제정한 The Oregon Death with Dignity Act에서 존엄사는 존엄 또는 자비를 목적으로 하는 자발적 안락사로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의사조력자살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와 동의어로 쓰인다. 다시 말해, 존엄사에 대한 일본의 정의는 오리건 주의 그것보다 더 제한적인 상황을 뜻한다. 존엄사, 그 취지는 좋았을지언정 혼란만 부추긴 결과를 낳았다.
바람직한 삶의 종료를 논의할 때 제 3의 용어를 택한 그룹이 있다. 의료계는‘안락사’가 거부감이 심하고‘존엄사’는 의미가 분명치 않으니, 중립적인 새로운 용어로서 ‘치료 중단’을 쓰자고 제안한다. 환자의 치료를 시작하지 않거나 일단 시작한 치료를 중지하여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치료 중단’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이 제안의 배경에는 의사가 안락사에 개입하는 것은 차단하되, 의사로 하여금 환자 또는 보호자와의 협의 하에 연명 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하자는 생각이 깔려있다.
의료계의 제안이 일견 신선한 시도로 보일 수 있겠으나, 문제는 우리 사회가 ‘치료 중단’이라는 낯선 용어를 논의의 장에 수용해 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칫 메아리 없는 함성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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