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불안과 혼란 그리고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
얼마 전 ‘포도나무를 베어라’라는 영화 시사가 있었다. 사실 영화 시사야 영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 날의 시사는 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좀체 영화관에서 만나기 힘든 신부, 수녀님들이 오셨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초청한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신 분들의 경우도 있었고, 영화관계자들도 가톨릭 내부의 반응이 궁금하던 터라 이번 시사를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한 신학생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불안과 혼란 그리고 용서와 구원에 관한 영화이다. 사제의 길을 선택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연소되지 않은 가슴의 응어리로 괴로워하다 여자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리고 여자와 닮은 수련수녀를 만난 뒤 그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자신의 아픔과 죄의식도 치유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매우 간결한 화법을 택하고 있다. 과잉이나 잉여가 없다. 사랑이나 연애의 코드가 있지만 멜로드라마적으로 접근하지 않음으로 해서 건조하기까지 하다. 신학생이나 사제가 등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무게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 무게에 휘둘려 비틀거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가 주는 무게를 덜어내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려 노력한다. 신부나 수녀가 ‘무오류성의 존재’가 아니듯이 그들의 아픔과 혼돈은 세속인의 아픔이나 혼돈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는 영화에 가톨릭에서 금하는 안락사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 영화를 본 수녀님이 했다는 이야기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저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아파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부피를 휘발시켜야 하는 것도 사제의 몫이다. 이 영화에 매우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피정 간 수도원의 외국인 노(老)수사가 어두운 얼굴을 한 수현에게 던지는 말이다.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
사제가 될 사람은 어둡고 무거운 얼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을 비우라는 말로 들린다. 사람들의 아픔을 몰라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아픔이나 고통에 가려 다른 이들의 것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다른 이들이 들어올 자리를 위해서 사제는 언제나 자신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구원의 방식은 현재보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방식이다. 마치 욥이 더 큰 시련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수현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을 때 여자의 죽음이라는 더 큰 시련에 직면하지만, 그와 똑같은 아픔을 가진 헬레나 수련수녀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용서를 받아줌으로써 수현과 헬레나 두 사람의 죄의식은 치유되는 것이며 다시 사제로서의 성소를 준비하는 본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의 감독은 민병훈이다. 민 감독은 러시아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벌이 날다’라는 영화로 테살로니키와 토리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카를로비바리 경쟁부문에 초청 받은 상태이다. 그의 영화는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 그리고 ‘포도나무를 베어라’까지 일상의 기적과 구원에 관한 메타포를 담지하고 있다.
아마 신자로서의 그의 신앙이 영화 속에 은연중에 또는 의식적으로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독이 될 수도 있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서 가장 탁월한 선교매체가 될 수도 있다. 현대가 영상에 의지하는 시대적 기류에서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매체로서 영화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유의 깊이나 정신의 정화작용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도 영화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들은 그 자체로 탁월한 신앙적 텍스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영화에도 신앙을 다루는 영화들이 나와야 한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그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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