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혼동말라
다음의 논증을 고려해 보자.
대전제: 무고한(innocent; 죄 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소전제1: 인간의 배아는 무고한 인간이다.
소전제2: 인간 배아 연구는 인간 배아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야기한다. _결론: 그러므로, 인간 배아 연구는 그릇된 일이다.
이 논증의 결론은 인간 배아 연구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일치한다.
이 논증은 형식적으로 타당한 논증이다. 논증이 타당하다 함은 만약 우리가 모든 전제들을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결론도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뜻이다. 이 논증의 대전제는 윤리 원칙으로서 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소전제2는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사실로서 참이다.
결론을 인정하기 싫다면 소전제1, 즉 인간의 배아가 무고한 인간이라는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 채, 인간 배아 연구를 지지하는 과학자, 기업가, 정치인들은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에서 초기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를 부분적으로 허용할 때 흔히 채택하는 기준이 이른바 ‘수정 후 14일’이다. 세포의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 단계인 수정 후 14일 이내의 인간 배아는 인간으로 볼 수 없으므로 연구를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수정 후 14일이 지나 원시 생명선(primitive streak)이 나타난 배아에 대해서는 연구를 허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배아를 희생하는 연구를 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일견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움직일 수 없는 주장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과학’의 탈을 쓴 선동(煽動)적 성격이 강한 주장이다. 과학적 진리는 결코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거의 모든 형이상학적 토대가 무너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을 진리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과학적 가설(假設)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태도는 과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일찍이 포퍼(K. Popper)가 설파했듯이 과학적 지식은 기본적으로 반증가능(反證可能, falsifiable)한 것이다. 과학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교조적인 과학이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과학’의 탈을 쓴 이단 종교일 뿐이다.
과학의 반증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수년 전 ‘네이처’ 지의 보도에 의하면, 일군의 과학자들이 난자와 정자가 수정된 후 24시간 이내에, 지금까지는 원시선이 나타난 이후에야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된 현상들이 결정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은 수정된 배아의 어느 한 부분에서 머리와 다리가 생기며 또 어느 부분이 등이 되고 배가 될 것인지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지 불과 수분 내지 수 시간 내에 결정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따라서 원시선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수정된 지 14일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배아가 완전한 생명이라는 종래의 가설은 과학적으로 반증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배아도 온전한 인간 생명이라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만약 이 가르침에 확신이 안 선다면 제 3의 길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다. 오늘날처럼 인간 배아의 법적.도덕적 지위에 관해 여러 의견이 혼재하는 상황에서는 안전한 쪽으로 실수(err on the safe side)하는 편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선택이다.
이는 사냥꾼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치 않으면 쏘지 말라’는 원칙을 따르는 것과 유사하다.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멧돼지인지 사람인지 확실하게 알기 전에는 총을 쏘지 않는 것이 사냥꾼의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구영모 교수 (울산대 의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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