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 인격체
지난 주 칼럼에서 필자는 인간 배아 연구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인간 생명이 수정 후 14일에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들의 견해가 인간 생명의 시작점에 관한 여러 입장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주 칼럼에서는 인간 생명의 시작점에 관한 다른 입장들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우선 출생을 들 수 있다. 출생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구분선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민법은 출생한 시점부터 권리와 의무의 주체인 한 인간으로 본다. 만약 우리가 이 견해를 취한다면 낙태가 정당화되기 훨씬 쉬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견해에서 태아는 결코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므로. 바로 이런 이유로 낙태 합법화에 찬성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 견해를 선호한다.
그러나 조산아(早産兒)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령 팔삭 동이 조산아는 정상적인 임신 말기에 있는 태아보다 생물학적으로 덜 발달되어 있다. 만약 출생을 인간 생명의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면, 조산아는 인간인 까닭에 죽여서는 안 될 것이나 이 보다 더 발달된 태아를 낙태해도 된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자궁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하는 존재의 위치가 그 존재를 죽이는 것의 정당성 여부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지난 30여 년간 미국 연방대법원은 태아가 자궁 바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기부터 비로소 인간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사건으로 불리는 이 역사적인 판결에서 미 연방대법원은 자궁 속의 태아가 체외생존 가능한(viable) 시점, 즉 임신 기간의 삼분의 이 되는 시점에 이르면 국가가 잠재적 생명을 보호할 합법적인 관심을 가지며, 이러한 관심은 체외생존이 가능할 때에는 강제적인 것이 된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미국 법원은 백년간 불법이었던 낙태를 부분적으로 합법화하는 길을 열었다. 이 판결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그간 여러 차례 있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체외생존 가능한 태아를 같은 발달단계에 있는 조산아와 대등하게 대우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의료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체외생존 가능한 태아의 경계는 점점 더 확장되기 마련이다. 지금은 육 개월 된 태아를 중절시켜서는 안 되지만, 삼십 년 전에는 중절시켜도 괜찮았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인간 생명 여부에 관한 결정을 기술발달에 의존해야 함을 암시하는 이 견해는 우리가 찾고 있던 절대적 기준점과는 거리가 있지 않는가.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인간 생명의 시작은 영혼이 육신에 들어오는 순간, 즉 태동(胎動)에서 비롯되었다. 13세기의 교부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태동은 수정으로부터 사십일(남아) 또는 팔십일(여아)되는 시점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적 증거가 결여된 이 가르침은 근대 생물학의 발전함에 따라 폐기되고, 19세기부터 가톨릭교회는 수정되는 순간이 인간 생명의 시점이라는 입장을 재정립하게 된다.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분명한 가르침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수정(受精, fertilization)의 순간부터 하나의 완전한 인간 인격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낙태는 살인이 되며, 당연히 금지된다.
교회의 입장이 워낙 선명한지라 다른 견해들과 타협을 시도해 볼 가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문제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세속적으로 별로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낙태는 물론이요, 잔여 수정란 생산이 불가피한 시험관 아기 시술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영혼의 구원과 개인의 실존적 선택은 함께 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일까? 바로 여기에 생활인으로서 우리 신자들의 고민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구영모 교수 (울산대 의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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