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펠림세스트(Palimpsest)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스어 palim(다시)과 psestos(지우다)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그 위에 다시 쓰려고 본래의 글자를 문질러 지운 양피지’란 뜻인데 먼저의 흔적이 어떻게든 배어있는 것이다. 이전의 건물이 치워진 자리에 현재의 건물이 서 있는 도시의 땅도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도시는 시대문화를 구현하는 유기체로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성장하고 변화한다. 정상적인 오래된 도시는 그대로 두어도 다‘역사의 펠림세스트’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그렇지 않다. 길과 땅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식의 전면개발과 재개발에 의해 시대의 흔적들이 거의 지워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600년의 흔적은 물론이고 불과 1세기도 안된 사이에 개화기 이후 역동하던 역사의 산증거물이던 근대건축물들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와 참혹한 6.25전쟁은 물론이고 60~70년대 산업화의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 아무런 역사적 기억도 불러내주지 않는 낯선 건물과 가로 속에서 우리는 과거를 잃고 산다.
서울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아직도 도시의 연속성과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는 곳을 든다면 역시 도심 중의 도심인 명동이며 그 중에서 명동성당과 그 주변 명동거리일 것이다. 이곳은 우리 근대화의 모체이자 근대역사의 현장이었으며,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곳이자 민주화의 성지요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 구실을 하여왔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명동성당을 제외하면 과연 언제까지 그 주변의 역사적 건물과 장소가 보존될 수 있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자주 지나치면서도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명동성당 구내만 하더라도 보존해야 할 역사적 건축물과 장소가 상당수 있다. 명동성당 전면 우측에 있는 구조와 내부공간이 변형되었지만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벽돌조 건물인 구 주교관(1890년 건축, 현 서울대교구청), 같은 양식의 바로 옆 구 주교관 별관(1920년대 건축, 현 주교숙소), 명동성당 뒤편의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구내의 구 서울관구성당(1930년 건축, 현 박물관)과 구 일본인성당(1928년 건축, 현 교육관) 및 베타니아집(1954년 건축, 현 은퇴수녀생활관), 그리고 국내 최초의 알루미늄커튼월을 사용하는 등 초기근대재료와 건축공법을 상징하는 명동성당 전면의 구 성모병원(1963년 건축, 현 가톨릭회관), 명동의 역사와 함께했던 언덕길, 성모동굴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문화재로 어떠한 등록이나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언제든지 소멸될 수 있다.
현재 명동성당은 수십억 원을 들여 5년째 벽돌보수를 하고 있다. 동시에 명동개발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일대의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계성초등학교가 이전되었고, ‘기도와 복음의 중심지인 동시에 3000년대에 걸맞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개발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고 곧 가시화 될 것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고 명동을 살리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크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울의 마지막 보루였던 이 곳마저 과거의 역사와 흔적이 지워진 낯선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명동의 매력은 역사성과 다양성에 있다. 입체적인 지형과 남산, 명동성당 등 다양한 조망, 여러 시대의 다양한 양식과 형태의 건물, 다양한 가구(街區)형태와 가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인간적 스케일과 건물,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과 시민의 애환이 깃든 뒷골목, 비좁은 골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참다운 우리의 것 등, 이 모든 것이 도심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잃어버린, 명동을 명동답게 하는 요소들이다.
새로운 길을 뚫고 기존의 획지와 가로형태를 바꾸어 첨단 대형건물로 채우는 개발보다는 역사적인 건물과 장소, 길을 보존하고 나아가 그것을 현실에 맞게 개선,활용하는 것이, 즉 보존과 활용을 조화시키는 것이 참다운 명동의 개발이 될 것이다. 이번 명동성당과 주변의 개발계획에서도 친숙한 도심의 전통적 문화경관이 파괴되지 않도록 역사적인 건물과 터는 어떤 형태로든지 보존되길 기대한다.
이번호부터
⑴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공학과)
⑵ 서북원 신부(수원교구 안양 중앙본당 주임)
⑶ 강동순 위원(한국방송위원회 상임위원)
⑷ 임통일 변호사(임통일 법률사무소)께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