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어 습관 중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미치겠다”는 말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뭔가 심각한 불만이 있는데 내 맘처럼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후렴처럼 덧붙이는 이 말을 사람들은 강조법으로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미치겠다’는 하소연보다도 더 심한 부정과 좌절, 한계 상황을 강조하는 ‘죽겠다’라는 후렴도 우리는 일상용어로 자주 사용한다.
너무 바빠서 밥도 거른 채 “바빠 죽겠다”를 외치며 일을 해야 했던 하루, 서글픈 샐러리맨은 퇴근 시간이 되어오면 “배고파 죽겠다”며 집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한여름 뜨거운 퇴약볕에서 농사짓던 농부는 “아이고, 더워 죽겠네” 하며 구부정한 허리를 편다.
스스로 죽겠다고 않더라도, 맘에 안 드는 상대에게도 자주 “죽인다”고 협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죽겠다”는 말을 한다. 길 가다가 발 밑에서 파란색 ‘배춧잎’ 한 장 발견하면 “좋아 죽겠다.” 혈기방장(血氣方壯)한 청년, 길가다 예쁜 아가씨를 발견하곤 “야~, 죽음이다”라고 한다.
필자는 ‘죽음’이라는 용어가 이다지도 가볍게 쓰이는 것을 보면서 가장 극한의 상황인 ‘죽음’을 일상의 것으로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용맹함과, 약간의 고통과 좌절에도 지나치게 쉽사리 극단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거망동에 대한 실망감을 함께 느낀다.
문제는 일상에서 가볍게 사용되는 ‘죽음’이라는 말의 무게가 어떤 이들에게는 실제로 생존의 포기에 까지 이르는 묵직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저 소소한 일상의 한계 상황을 불평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못하고 아예 존재 자체를 포기하는 극한적 선택을 하기에 이르는 사례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정부나 각종 민간 기구들의 통계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죽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급기야 ‘죽음’을 실제로 선택하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와 경향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윤리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하나는 자기 생명을 포함해서 인간의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과 생명을 오로지 내 것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고 복음은, 나아가 우리의 이성까지도 생명이 오직 내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자로부터 주어진 은총이요 선물임을 가르친다. 내 것이라고 함부로 하면 안됨은 물론이요, 하물며 원래 내 것도 아닌 것을 받아서 내 맘대로 그 생명을 종식시키는 것은 가장 커다란 윤리적 죄악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과연 우리 이웃의 고통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가 하는 반성이다. 대개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이들은 수없이 자기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고 한다.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무수하게 보내는 구원의 요청에 우리는 너무나 둔감하다. 그런 사회는 사랑을 잃어버린 사회이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결국 사랑만이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다시 돌려줄 수 있다.
박영호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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