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가 아닌 명백한 살인행위인 ‘죽이느냐, 살리느냐’ 문제로 논쟁의 장이 뜨거워지고 있다.
치료하지 못하는, 그래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환자들의 생명연장을 놓고 논쟁을 벌여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안락사’ 논쟁이 불붙고 있다.
지난해 12월, 40년 넘게 근위축증을 앓아 오던 이탈리아의 웰비씨의 요청으로 9년간 생명을 지속시켜 오던 인공호흡기를 떼어냄으로써 안락사를 시켰던 의사를 이탈리아 내과의사협회는 ‘모범적인 행위였다’면서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더욱이 가톨릭 국가인 로마에서 안락사를 인정하는 이같은 결정으로 지금 세계의 초점이 되고 있다.
‘환자에게도 편안하게 죽을 권리를 달라’며 안락사를 찬성하는 입장과 ‘그 어떤 죽음도 인간의 손을 빌려서는 안 된다’며 생명 존엄성을 외치는 반대 입장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과연 인간에겐 죽을 권리가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죽일 권리’도 없지만 ‘죽을 권리’도 없다. 단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목숨만 유지하고 살아가는 환자의 입장에선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 있다.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환자로 인해 온 가족이 생계를 포기할 정도로 매달리고 치료비 역시 큰 부담이 된다. 그래서 희망보다는 고통만을 안겨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모든 환자에게 안락사를 인정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치료비 걱정에, 유산 때문에 또는 평소의 좋지 않은 감정 때문에 환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안락사를 실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안락사를 인정하자고도 하겠지만 개울물이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처음엔 여기까지만 허용한다고 했다가도 차츰 차츰 시간이 지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죽었다고 판정을 내렸던 환자가 어느 날 의식이 돌아와 지금 우리와 같이 산다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실제로 식물인간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판정받았지만 다시 살아난 사례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남아있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안락사를 시켰다면 소중한 생명을 죽인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도 안락사는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나에게 이러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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