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개발보다 보존 필요하다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어지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세계화, 정보화, 지식산업 등의 숨가쁜 경쟁에서 지쳐버린 현대인들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과거에는 주로 명승지와 관광지를 찾았으나 주5일 근무제 도입, 고속철도와 고속도로망이 갖춰진 오늘날에는 문화유산 답사, 테마관광 등 관광형태가 다양화되고 있으며, 종교사적지도 성지순례 뿐만 아니라 유산 관광의 대상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순례관광?
소득이 높아지고 여가시간이 증가되면서 ‘웰빙’(well being)과 ‘삶의 질’에 대한 요구가 관광의 문화적인 측면, 정신적인 측면으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국토균형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의 명분아래 진행되고 있는 지자체의 경쟁적인 관광개발 유혹에 천주교 성지유산과 순례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더욱이 ‘순례’와 ‘관광’이라는 두 용어의 언어적 퓨전인 ‘순례관광’에 이미 익숙해지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는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관광은 기본적으로 ‘즐거움을 위한 여행’으로 즐거움, 마음대로 하기, 만족, 기쁨, 행복, 환희 또는 쾌락을 특징으로 한다. 순례 또한 여행으로 비슷하긴 하나 목적은 다르다. 순례는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얻기 위하여 또는 회개, 감사, 신심의 행위로 거룩한 장소나 성지를 여행하는 것’이다. 순례는 정서적으로 한가한 여행을 의미하지 않는 반면 관광은 즐거움을 위한 여행이다.
성지조성의 방향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크고 작은 성지는 전국적으로 약 100여 곳으로 크게 순교 성적지(聖蹟地)와 천주교 사적지(史蹟地)로 분류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성지조성은 ‘개발’의 개념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동안 흩어지고 잊혀진 유물과 유적을 찾고 소요공간의 확보와 순례자를 위한 요구 시설의 건설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성지는 성지로서의 외형적인 모습을 갖추었지만 성지순례의 프로그램이나 공간구성이 비슷하고 대형화를 지향함으로써 관광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최근 지자체의 개발계획과 연계하여 계획되고 있는 성지개발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성지조성의 방향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본다.
첫째, 성지는 그 발생동기가 다양함으로 획일적인 개발을 할 것이 아니라 유형별 특성에 따라 특색 있는 개발과 보존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지의 역사성과 장소성에 대한 교회사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건축적, 환경계획적 차원에서의 마스터플랜이 필수적이다. 백화점 나열식 개발은 지양해야 한다.
둘째, 무분별한 개발을 억제할 수 있는 보존, 복원 개념의 기본방향이 설정돼야 한다. 과거의 모습을 현재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미래의 시간까지도 배려된 성지로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어쩔 수 없이 재현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복원한다면 충분한 고증이나 자료가 필수적이며 시대적 의식도 그 밑받침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현장을 희화(戱畵)하는 일이 되며, 진정성(眞正性)이 확보되지 못한 셋트 조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우리나라의 성지는 대부분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경관적 가치와 환경을 보존하고 가꿔나가야 한다.
다섯째, 나아가 하드웨어 중심의 성지조성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의 프로그램 개발과 순교영성의 개발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여섯째, 관광과 순례가 지속되려면 문화유산이 유지돼야 한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보물인 성지 유산은 한국 가톨릭 문화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가톨릭 문화에 대한 존중을 증진시키고 공동체의 사회적 결속에 공헌한다. 관광객이나 순례객들에게 그들이 접하는 가톨릭 문화의 고유한 가치에 대하여 교육함으로써 일반적으로는 가톨릭 문화를, 구체적으로는 가톨릭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보호하는데 공헌한다.
방문할 만한 보존된 유산이 없는 성지에는 순례도 관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제는 개발이 아니라 보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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