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노인이라고 여기는 나이는 연세가 많아질수록 높아진다. 보통 65세쯤 되시는 분을 노인이라 부르는 건 삼가야할 일이지만 크게 야단맞지는 않을 것이다. 65세는 서양에서는 은퇴연령이고 우리나라의 경우 노인복지법상 경로연금수급권 대상자가 되는 나이이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세계평균의 반도 안 되는 1.19명 언저리를 맴돌고 있고 농어촌지역의 경우는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100명에 30명이상이 되는 소위 ‘초초고령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2005년에 생산가능 인구 7.9명당 노인 1명을 부양하던 것이 이 추세로 2030년 가까이가면 2.7명이 노인 1명의 부양책임을 지게 된다. 지난 번 TV에 노인들이 주민의 대부분인 마을에서 70대 할머니가 친구들과 놀다말고 90대 시어머니 수발하시러 집에 가시는 모습이 나왔다. 넓은 집 안마당엔 어린 애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장면만 봐도 ‘고령사회’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최근 중국 상해의 어느 노부부는 아파트 한 채를 경품으로 내걸고 자신들의 노후에 함께 생활할 젊은 부부를 구하는 광고를 냈다는 인터넷 기사를 봤다. 하나 밖에 없는 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노부부의 허전한 보금자리를 가정다운 온기로 채우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한다.
우리세대가 노인이 되면 우리 아이들 세대가 짊어져야 할 세금이나 보험료 등 부담이 너무 커서 물에 젖은 솜 다발을 등진 나귀처럼 허덕거릴 것이다. 그것은 젊은 세대들의 눈앞에 뻔히 보이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암담한 노후보다 젊은 세대들의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내가 아는 젊은 부부는 집 마련할 때까지 애 낳는 것을 연기했다가 최근에 집을 샀다고 얼굴이 환해졌다. 2세 출산에 대해 물었더니 양육비 교육비 생각해서 이젠 무기한 연기란다. 그 부모님은 손자 손녀 나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던데, 대출금 갚을 적금 붓느라 새로 산 집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단다. 이 젊은 부부에게, “애는 엄마 뱃속에서 자기 먹을 것 짊어지고 나온다. 교육이야 사정 닿는 대로 해야지 남의 눈치 볼 것 없다”고 말해 봐야 웃기만 할 뿐이다. 지금은 그 부모님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따로 살고 있지만 더 늙고 병들면 노부부와 이 젊은 부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늘어났지만 전체수명 중 건강하게 생활하는 기간보다 건강악화로 타인에게 의존하게 되는 기간 즉 ‘의존평균수명(defendent life expectancy)’이 10년 정도로 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2008년 7월 1일부터 노인수발 보험제도를 실시한다는 소식이다. 노인수발문제는 노인학대 문제와 더불어 자못 심각하다.
이와 같이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부족에서 오는 문제에 대한 대책이 세금 많이 걷는 정부정책만으로는 안될 것은 뻔하다.
어떤 학자가 일정한 공식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했다. 미국 펜실베니아에 소재하는 기독교 한 종파 공동체 아미쉬 마을은 세계최고 부자들 그룹과 함께 6점 만점 중 5.8점을 얻었다. 이 공동체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아직 동물의 힘을 빌어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시대에 돌입하였지만 1만 달러시대와 비교하여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글로벌 경쟁을 벌이고, 우리가 물질적 풍요와 넘치는 지식 교육활동에 빠져든 결과 저출산 고령사회라는 재앙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재앙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속이 이웃에게 편안한 쉼터가 되지 못하고 자신에게도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물질과 재산에만 마음을 빼앗겨서 미처 자신 속에 살아 계시는 주님이라는 안식처를 잊고 사는 이유이다. 이러한 태도는 물과 공기와 다른 환경자원이 지금 당장 다이아몬드 같은 교환가치가 없다고 해서 소홀히 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다.
건강하고 성공한 삶도 있지만 병들고 처절한 삶도 하나의 삶이다. 병들고 처절한 삶은 영적인 성숙의 기회가 되고, 연약한 아기나 쇠약한 노인은 우리의 삶을 사랑스럽게 하고 고귀하게 하는 대상이다.
저출산 고령화사회의 위기는 사랑과 선행의 실천으로 극복할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 젊고 늙는 생명의 주기를 살다 가는 여행자이다. 여행자가 주님의 사랑이 통하는 생명의 통로를 벗어나 병을 얻었을 때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여행자의 영원한 오아시스 바로 주님의 품이다. 이 오아시스에서 이웃의 사랑과 선행은 우리에게 생명수가 된다. 우리가 희망을 두는 사회는 국민총생산이 많은 나라가 아니다. 바로 늙은이나 젊은이나 서로 사랑하고 선행을 베푸는 사회 즉 생명의 가치가 넘치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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