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품에 꼭 안아주자
아주 오래 전, 필자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누나의 해산 소식을 들었다. 딸이었다. 우리 집안에서 유일한 딸이었기에 필자는 조카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어머니는 아기에게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가 보라고 하셨지만 그 사이를 못 참고 누나의 허락에 단숨에 달려가 영욱이와 처음 만나게 됐다.
필자의 조카 중에 유일한 딸이었기에 기대가 컸다. 기대했던 대로 코가 오똑하고 눈이 맑고 예쁜 아이였다. 누나의 권유로 아이를 가슴에 안아 보았다. 너무나 작아서 가슴에 채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포근하고 따스했다. 아이가 잠시 놀랐는지 파르르 떨더니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필자는 이 아이를 통해 생명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뽀얀 살결,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 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 이 아이를 보는 순간 이 아이를 평생 책임지겠다는 결심이 올라왔다. 그래, 네가 잘 자라도록 늘 옆에서 지켜봐주고 기도해 줄게….
영욱이를 다시 누나의 품에 안겨주고 바라보니 아이를 품에 안고 옆으로 누워있는 누나의 모습이 마치 구유 같았다. 아이를 가운데에 보호하고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초생달 모양의 구유를 연상케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니 누나는 실로 영욱이에게 평생 구유였다.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 6~7) 아기 예수님이 이 구유에 눕혀졌다는 말은 의미가 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구유는 생명을 담는 자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참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이 생명의 자리인 구유에 눕혀졌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몇 년 전 이란에서 강도 6.5의 대지진으로 약 4만 여명의 주민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했던 적이 있다. 가난한 동네의 대부분 집들은 기반이 약한 흙집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 참혹한 죽음의 자리에서 사흘 만에 한 가족이 발견되었는데 엄마, 언니, 오빠는 모두 사망하고 6개월 여자아이만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발견 당시 여아는 엄마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엄마의 품이 아이에게 공간을 제공하여 숨을 쉬고 생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엄마의 품이 생명의 자리, 곧 구유였다.
“(동방박사들이)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렸다.”(마태 2, 11)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7~19)
동방박사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 깊은 예를 표하고, 목자들이 몰려와 아기에 관하여 들은 바를 전하였을 때 성모님은 무엇을 마음에 새겼을까? 그것은 이 아기의 평생 구유가 되어 어떠한 일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굳은 결심이 아니었을까? 그 결심은 실천되었다. 성모님은 제자들이 모두 무서워 도망간 십자가 아래의 빈자리를 끝까지 지켜주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안아 주시면서 마지막 순간에도 구유가 되어 주셨다.
생명 운동은 바로 세상의 구유가 되어주는 운동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들(배아, 태아, 장애아, 식물상태의 환자 등)이나 세상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주어진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사람들(안락사, 자살시도자 등) 모두를 품에 꼭 안아 주어야 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우리의 소명이 아닌가 싶다. 세상의 구유가 되자.
우재명 신부 (서강대 신학대학 원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