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알 권리·비판할 권리 막아서야
참여정부가 5월 22일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내놓았다. 각 부처에 있던 기자실을 없애고 중앙청사, 과천청사, 대전청사 3곳에 대형 브리핑룸을 두겠다는 게 발표 골자다.
“몇몇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사 담합이나 하고 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관에 따르면, 세금 축내는 기자실을 없애고 브리핑을 통해 취재를 지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선진적 방안 같다.
하지만 아니다. 새 언론규제의 핵심은 언론의 관청 출입과 공무원 접근을 막는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정부가 브리핑하는 내용만 받아 적으라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나라에 이런 언론정책은 없다.
1987년 1월 15일 보도된 서울대 박종철 군 사망 사건을 기억하는가. 당시 석간이었던 중앙일보가 ‘서울대 학생 박종철 군이 서울 시내 갈월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서 조사받다 쇼크사로 숨졌다’고 사회면 2단 기사로 실으면서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중앙 신성호 기자가 평소처럼 검찰간부 방마다 차례로 들러 차 한 잔 같이 마시는 과정에서 건진 뜻밖의 특종이었다.
기사가 터지자 치안본부장은 할 수 없었던지 “‘탁’치니 ‘억’하고 숨졌다”는 유명한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참여정부의 ‘선진화 방안’대로라면 언론은 여기까지밖에 쓸 수 없다. 보충질문을 해도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다.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어도 안 받으면 끝이다. 사무실로 찾아가더라도 사전 약속이 없으면 청사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지금도 공무원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함부로’ 인터뷰를 하면 문책 당하는 판인데, 앞으로 ‘지원’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나.
당시 동아일보는 중앙의 첫 기사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사회부기자들을 총동원해 검찰청을 비롯한 출입처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이렇게 거칠게 취재를 했기에 우리는 고문치사 가능성을 확신했고, 며칠 뒤 4단 크기 이상 쓰지 말라는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1면 톱기사를 내질렀다. 바로 이런 취재보도를 못하게 하는 것이 이번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다. 그러고도 노대통령은 “국제적 기준에 맞추기 위한 선의의 정책”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정권을 잡았다고 과거 그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군사독재정권보다 더한 언론탄압을 고안해낼 수 있는지.
노 대통령은 몰라도, ‘청와대 386’은 당시 민주화항쟁에 앞장선 피 끓는 젊은이였다. 여권 핵심 중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가 김수환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들을 죽이면 안 된다”고 요구해 살아난 민주화인사들이 수두룩하다.
몇몇 신부님도 이해할 수 없다. 노대통령의 ‘정신적 지주’이자 부산 출신 참모그룹의 ‘대부’로 불리는 송기인 신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돼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쓰는 중이다. 정의를 외쳤던 사제의 이름으로 지금은 정의롭지 못한 일에 앞장서는 신부님도 없지 않다.
정말 암울하고 앞이 안보였던 군사독재시절 가톨릭은 정의의 종교, 국민의 희망, 언론의 버팀목이었다. 추기경님을 비롯한 사제들은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말과 행동을 해주어 오늘의 우리나라를 일구었다.
2005년 10월에도 추기경님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간판만 대한민국이지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려운 말씀을 했다. 그러자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그때 우리를 빨갱이로 몰던 사람들이 요즘 와서 이념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살면서 별꼴 다 본다는 생각을 한다”고 곧바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가 지금 노대통령을 계승할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조차 우스운 시대다. 대명천지 21세기에 다시 언론자유를 외치게 되다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세금 내는 국민이 그 돈으로 정부가 하는 일을 알 수 없고, 비판할 수 없다면 그건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를 했으니 민주주의가 분명하다고 누군가 맞받는다면, ‘자유민주주의’ 아닌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21세기의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베네수엘라나, 얼마 전 대통령선거에 나왔다가 고배를 마신 프랑스 사회당처럼 ‘참여 민주주의’쯤 된다고 애써 봐줘야 할 판이다. 하기야 이 정부가 붙인 정부이름이 바로 참여정부 아니던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