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제3대 교구장 정명조(아우구스티노)주교가 지병으로 인해 6월 1일 새벽 우리 곁을 떠났다. 부산교구민과 정주교의 선종을 슬퍼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정주교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정명조 주교는 30여 년간을 군인들을 위해 사목 열정을 쏟았다. 1965년 중위로 임관, 1985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 까지 20년을 군종신부로서 군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군인들을 위한 20년의 시간이 모자랐는지 정주교는 1989년 한국교회 초대 군종교구장 주교에 임명돼 10년을 또 다시 군인들을 위해 온 정열을 다 바쳤다. 군종교구장 시절 정주교는 군종신부와 군인들에게 해 준 것이 없다며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처럼 겉으론 강한 인상을 비추지만 속으론 따뜻한 정을 가지신 분이셨다.
정명조 주교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느낌은 ‘처음 대할 땐 날카롭고 다소 차가운 분위기이지만 무척 정이 깊으신 분’ ‘한번 사귀면 끝까지 정을 나누는 변함없는 분’이라고 말한다.
정주교는 한마디로 ‘의리의 사나이’였다. 소탈한 성품은 누구라도 구별없이 한결같은 믿음으로 대했다. 근검절약 역시 몸에 배였다. 이면지를 메모지로 사용했는가 하면 큰 불편이 없으면 무조건 아꼈다.
그러나 필요한 곳에는 아낌없이 다 내어놓으면서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나눔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드러나지 않게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사회복지시설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30년간의 ‘군인생활’을 마감하고 부산교구 3대 교구장으로 임명됐을 때 정주교는 부산교구는 꽃이 막 활짝 피어있는 단계라면서 이 꽃이 계속 활짝 피어나도록 뒤에서 힘껏 도와나가면서 신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교구장에 착좌했을 당시 부산시민이 540만 명이었다. 그런데 신자는 불과 35만여 명으로 복음화율이 6.3%에 불과했다. IMF로 실업률이 전국 최고였다. 그래서 맘 고생도 심했을 것이다.
정주교의 사목표어인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 온 정주교였기에 그를 떠나보내는 우리는 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안타까움에 머물기보다 정주교의 바람대로 모두가 변화되어 기쁨을 주고받는 신자가 되고자 다짐하면서 정주교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마음 모아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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