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구현, 교육기관 정체성이자 복음화 사명
1987년 6월항쟁 후 20년이 지난 한국 사회에서 이젠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은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사회의 지도층이나 정치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준거를 사회정의에서 찾는 예는 드물고 대학사회는 더 이상 독재와 싸웠던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 쉬는 전당이 아니다. 비판정신이 거세된 대학사회는 마치 거대한 취업준비 학원과 같은 것이 되었다. ‘정의’에 대한 목마름은 잊혀지고 대학의 순위경쟁과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에 교육의 가치가 압도되는 이 시대 상황에서 ‘정의’는 이젠 옛날 일인가?
야훼 하느님의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 23~24)라는 말씀도 이젠 옛날 말씀인가? 이런 가운데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대학, 특히 가톨릭계 대학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잊혀져가는 그 ‘정의’는 가톨릭계 대학의 교육이념이며 상당히 구체적인 것이다.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계 대학들의 사명을 교회가 현 시대의 문제들과 요구들인 “인간 생명의 존엄성, 모두를 위한 정의의 촉진, 개인 및 가족생활의 질, 자연의 보호, 평화와 정치적 안정의 추구, 세계 자원들의 보다 공정한 나눔, 그리고 국가 및 국제 수준에서 인류 공동체를 위해 더 잘 봉사할 새로운 경제?정치적 질서” 등에 대처하도록 돕는 것이라며 ‘정의’를 강조했고, 서강대학교 등을 비롯한 전 세계 예수회 대학의 교육목표 역시도 ‘남을 위한 삶’,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며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을 갖고 정의를 위한 삶에 투신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신앙이 정의의 요청과 정의 구현에 관여해야 한다”는 성경의 정수(精髓)를 외면할 때 성경은 개인 신심을 위한 책자로 하락될 수 있다. 성경은 ‘과부와 고아와 뜨내기와 빈민들에 대한 관심’ 및 ‘연대’가 ‘정의’이며, ‘야훼를 안다’는 것은 곧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안다’는 것은 지성적 인식만이 아니라 내심의 지식과 인격적 투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곧 가톨릭계 교육기관의 정체성이자 대학교육의 방향이며, 더 나아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취지에서 미국 28개 예수회 대학들과 타 국가의 예수회 대학들이 모여 2005년 10월에 미국에서 개최된 ‘예수회 대학의 정의에의 투신 회의’에서는 ‘정의에의 투신’ 노력이 양성과 학습, 연구와 수업, 그리고 학교 운영 및 행정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사례들이 발표되었다. 특히 ‘전인(全人) 교육’을 위해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 교육된 연대성’이며, 형성과정에서 학생들은 반드시 ‘모래투성이인 이 세상 현실’을 그들의 삶 안으로 집어넣어, 남들, 특히 불이익을 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권리를 위해서 인식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이들과 실제 현장에서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또한,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은 대학 지식이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자문해야 하고, 연구와 강의 속에서 이러한 ‘정의’와 ‘연대’를 지향해야 할 것이며, 학교의 운영과 행정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및 가톨릭적 가치의 실제적 구현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정의에의 투신’ 노력은 모든 과목, 모든 전공에서 봉사활동과 함께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 정의와 기업 경영,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과학기술과 환경 정의, 역사 속의 의로운 투쟁사, 법과 정의 등의 주제가 전공 교과 내용에 포함되고, 정치학 전공학생의 공명선거 감시활동, 화학공학 전공 학생의 공장 지대의 유해 폐기물처리 과정 조사활동 등, 현장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가톨릭계 대학들이 강조하는 ‘남을 위한 삶’과 ‘정의에의 투신’이 구호에 머물지 않고 시장논리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교수와 학생, 직원, 학교 공동체 모두가 연구와 교육 및 행정에서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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