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인생살이를 일러 종종 말한다. “사는게 뭔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리 아등바등 악다구니를 쓰면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겠다는 자탄의 소리이다.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 잔 하며 나누면 제격이다.
성심껏, 열심히 해도 안되는게 너무나 많은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이런 한탄은 서로에게 다소나마 위안을 준다. 그 위안의 힘을 입어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며 또 하루를 산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은 가치 있음을 누구나 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는 건 무엇인가.
천만다행으로 납치됐던 인질들이 풀려났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이어지고 있다. 무분별한 공격적 선교 행태에 대한 자성은 개신교 자체로부터 나오고 있다.
선교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오랜 성찰과 논쟁의 주제였던 이 문제는 한 마디로 말할 수도, 어느 한 입장에만 설 수도 없는, 그래서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가톨릭교회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미 잘 알다시피, 가톨릭교회가 교회 밖에 열린 자세를 갖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에 불과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야 비로소 교회는 공식적으로 교회 밖의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러운 자세를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종교인이 첫째, 자신의 신앙과 그 신앙에 따른 삶의 본질과 소명을 잃지 않으면서, 둘째,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확신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셋째, 자신의 신앙을 설득력 있게 제시, 즉 선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균형의 문제가 아니다. 선교,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개종의 시도와 타인에 대한 존중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것은 전적으로 삶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모범을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본다.
이른바 ‘대조사회’로 파악되는, 주위의 세속적인 사회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삶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의 선포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하느님 말씀 그 자체가 지닌 신적인 능력이었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의 뚜렷하게 차별되는 삶이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일렀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포는 자기 삶에 그 힘의 바탕을 둔다. 타계하신 구상 시인은 항상 주위 문인들에게 “언어로 작업하는 이들은 자기 언어와 같은 무게의 진실이 담긴 삶을 사는지를 늘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결국 “사는게 선교”다. 굳이 개종을 강요하지 않아도 하느님을 따라 사는 대조적 삶이 드러나면 그것이 온통 선교라는 이야기다.
테레사 수녀가 언제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들에게 개종을 이야기했던가?
이른바 공격적 선교, 제국주의적 선교 방식은 자기 삶에 바탕을 두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엄청난 부작용이다.
박영호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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