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이제 ‘민주주의’는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환경이자 더 이상 논할 게 없는 명제인가?
물론, 민주주의는 독재와 반대말이지만, 그렇다고 독재가 무너지는 순간에 완성되는 것은 아니며, 시작될 뿐이다. 제도적인 개혁을 통한 민주주의의 신장, 예를 들어 의회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강화, 정당 내의 민주화, 이익집단의 활성화, 언론의 민주화 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민적 하부구조인 민주적인 시민 윤리와 시민 문화의 정착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존엄성, 공공질서 덕목, 합리적 의사 결정, 사회 참여와 비판, 공동체에 대한 협동과 연대의식 등이 토대가 되어야만 민주주의는 모래 위에 지은 누각이 아닐 수 있다. 더 나아가, 현재의 ‘민주주의’가 과연 제대로 된 민주주의인지,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지 늘 깨어서 지켜보는 일이 중요하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 및 ‘공동선’을 담기 위해 가장 낫지만 ‘깨지기 쉬운 그릇’이므로, 가톨릭 사상가인 자끄 마리땡의 지적처럼,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본래의 원형을 유지하려면 ‘복음적 영감’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번 속히 행동에 나서라고 요청”하며 “평신도들은 현세적 질서의 쇄신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겨야” 하고 “자발적인 구상과 계획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 사회 공동체의 법제와 조직을 그리스도화 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팔십주년’ 48항, ‘민족들의 발전’ 81항)
아울러 ‘공민 교육’과 ‘정치 훈련’, 즉 가톨릭 가치관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 교육 내지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민 교육과 정치 훈련은 국민 대중과 특히 청소년들에게 매우 요긴한 것이므로, 모든 국민이 정치 공동체 생활에서 각기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다.(‘사목헌장’ 75항)
결국, 정치인이나 다수의 국민들 양쪽에 공히 요구되는 것은 자기들의 사적인 이익이나 행복을 다소 희생해서라도 공동선을 앞세워 실천할 수 있는 정신과 자기 절제 및 책임감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탁월한 정치적인 식견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민주적 시민성’의 기초는 공공질서에 대한 윤리의식 및 시민예절일 것이다. 법과 윤리를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반칙 사회’를 정직에 바타을 두는 ‘신뢰 사회’로 바꾸어 가는 운동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닐까?
한국 사회를 윤리적으로 성숙한 사회로 가꾸어가기 위해 몇 년 전에 창립된 어떤 시민단체는 다음의 여섯 가지를 행동수칙으로 정하고 일반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데, 그 여섯 가지는 ‘자신의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진다’, ‘환경 보호와 검소한 생활로 공동의 자산을 아낀다’, ‘교통 규칙을 비롯한 기초 질서를 지킨다’, ‘정당한 세금을 납부한다’, ‘뇌물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이다.
즉, 소위 ‘민주화된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적 시민성은 이렇게 기초적인 윤리의 확립부터가 당면과제인 것이다. 에티켓과 기본질서, 규칙이 준수돼야 민주주의 작동의 기본 전제인 ‘사회적 신뢰’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줄서기, 뇌물 안 주기, 열 번 조이라는 볼트는 정확히 열 번 조이기, 돈 받고 검사필증 내주지 않기, 경찰이 있든 없든 빨간 신호등에는 무조건 서기’와 같은 기본질서와 양심을 모두가 지킬 것이라는 신뢰부터가 없기에 한국 사회에는 야만성과 파행성이 팽배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앙인들은 어떤가. 사소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이러한 기본질서와 양심을 신앙인들부터 먼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민주적 시민성과 민주주의의 기초이고, 사회적 신뢰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것에서부터의 솔선수범이 ‘현세적 질서의 쇄신’ 및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 사회 공동체의 법제와 조직을 그리스도화 하는 것’의 출발점임을 우리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
‘민주적 시민성’은 민주적 질서를 추구하는 ‘신앙’실천의 기본 아닐까? 기본질서의 양심을 남들보다 먼저 솔선하여 지키는 일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 의의는 참으로 클 것이다.
그동안 집필해 주신 곽승룡 신부, 김순덕 위원, 서정홍 위원, 김녕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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