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절제의 결과
돌이켜보면 성장통을 앓던 사춘기는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방황의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은혜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그래서 기도하며 하느님을 찾았던 시절이었기에 “오 복된 허물이여!”의 의미를 절감하던 시기였다.
군부 압제에 짓눌리던 시절에는 늘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 살았기에 흠 잡힐 일은 피하고 근신할 수밖에 없었다. 모범적인 젊은이로 주위에서는 평가했는지 모르지만 내 자유의지의 선택이었기 보다는 강요된 절제의 결과 빚어진 우연의 부산물이었다.
분명 위험한 고비 길의 지난날들이 정년을 맞게 된 오늘의 나를 보면서 새삼 축복받은 날들이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풍요로운 여건으로 요즈음의 일상은 모든 면에서 외적으로는 안정된 것 같이 보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위기감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자람에서 벗어난 나의 일상은 어느덧 안락함에 길들여져 조금이라도 거북하거나 신경 쓸 일들은 자동적으로 회피하면서 그때마다 ‘내가 나서서 남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불의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데’ 라는 변명으로 자위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요즈음 자주 우리 교회의 위기를 지적하는 말들을 듣게 된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것이 세계교회거나 한국교회거나, 외적 탄압의 수난의 시기에는 겉으로는 부자유스러웠지만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참된 의미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외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교회가 기득권층으로 편입되면 될수록 위기를 맞게 되는 것 같다.
오늘 한국교회도 이 틀에서 크게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유신 무렵의 상황과 최근의 황우석의 경우가 적절한 예이다. 현실에의 안주가 아니라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비록 외적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진정 은총의 시기인 것 같다.
풍요함에서 오는 죄의 유혹
얼마전 우연히 월남전의 고엽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까지는 고엽제라고 하면 의례히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성분의 화학제품으로만 짐작했었는데 실제로는 그 정반대였다. 식물의 성장을 급격하게 촉진하여 미처 뿌리가 몸통의 영양을 제대로 뒷 받쳐주지 못해 결국은 개체 전부가 말라 죽는다는 설명이었다.
이처럼 위기는 모자람에서 오기 보다는 오히려 넘쳐남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모자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 차리고 있기에 언젠가 개선의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당장은 불안해 보이지만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지만, 풍요함에서 오는 여유는 경계심의 고삐를 느슨하게 하여 나태의 길을 재촉하고 우리로 하여금 쉽게 죄의 유혹에 빠지게 만든다. 요즈음 우리도 안락함에 길들여져 참된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조차 거북해하는 것은 아닌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진복팔단의 삶을 사는 것이 절실한 시기이다.
우리가 정신 차리고 있지 않을 때 쉽게 세속논리에 휩쓸리게 된다. 수단의 정당성은 아예 잊어버리고 오로지 목적만을 달성하면 그것이 성공이요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그릇된 생활 태도가 세속논리이다. 나아가서 누가 동기나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의 넋두리 정도로 치부하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 세태가 되었다. 교회가 그처럼 역설하는 “목적의 정당성만이 아니라 수단의 정당성”이라는 윤리의 대원칙은 우리 주변에서 갈수록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동기가 결과를 정당화한다
결과로 오늘 한국사회의 최고합리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기업의 목적과 시장의 기제 등 경제 영역에서, 선거제도와 정부역할 등 정치 분야에서, 여론조사 등 사회 차원에서 공리주의의 영향은 확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양적 판단기준이 질적 의미를 뒷전으로 밀어버려 배부른 돼지가 배고픈 인간 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즉 가치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세대가 전개되고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한때 이념논쟁의 초점이었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라는 그릇된 주장이 아니라, ‘동기가 결과를 정당화 한다’라는 윤리가 확고하게 기본가치로 자리 잡아야 한다. 안락함에서 깨어나 우리 이웃을 이해하고 이웃과 나눌 때 이 같은 남을 배려하는 자세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가장 비윤리적 구습에서 벗어나 복음의 가치를 전파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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